"상대 죽이겠다는 맘으로 링 올라야 이길 수 있다" |
중2때까지 시합 나가면 한판패→중3때부터는 무적행진 |
#1. '점짜리'가 된 '한판'
84년 LA올림픽 유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사나이다운 화끈한 승부로 조국에 금메달을 척척 안기는 안병근과 하형주의 늠름한 모습을
보면서 유도에 홀딱 반해 버렸다. 한국의 올림픽 유도 첫 금메달이라는 의미도 심장을 데웠다. 뽀얀 도복 입고 매트 한번 밟아 봤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다. 서울 당곡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학교의 간판 육상선수로 활약하던 운동선수 입장이라 감동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올림픽으로 인한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중대한 결정 하나를 내렸다. '체육중학교 가서 유도를 하자.' 조금은 충동적인 면도 없잖았으나 부모의
동의를 얻어 기어이 서울체중에 원서를 냈다. 60명 뽑는데 전국에서 1500명이 몰려들었다. 합격자는 체력과 IQ 테스트로 가렸다. 일단 빠른
데다 체력장검사 하면 턱걸이, 윗몸일으키기 등 전 종목에 걸쳐 만점을 맞았을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으니 입학원서 내는 순간 합격증은 받아놓은
거나 진배없었다.
입학과 함께 종목당 이틀씩 15개 종목을 차례로 돌리며 골고루 맛을 보여 줬다. 최적의 종목을 연결하기 위한 학교 나름의 적성검사 방법이었다.
한데 결과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복근과 배근이 잘 발달해 있으니 역도를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한 달 남짓 적성검사 때 건성건성 시간만
때웠다. 다른 종목에는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다른 종목 할 것 같았으면 애당초 서울체중에 지원도 안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찌감치 유도
감독을 찾아가 '죽어도 유도를 해야겠다'고 속내를 밝혔고, '내가 뽑을 테니 걱정 마라'는 답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결국, 적성검사 결과와는
관계없이 도복을 입어 일차 소원은 풀었다.
"맨 처음 낙법 배우고, 기술 배우고 할 때는 참 재밌었습니다. 방에다 이불 깔아놓고 연습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힘든 거예요.
특히 조르기, 꺾기를 배우면서 선배들한테 걸려 기절까지 하고 나니 굳히기 시간이 무서워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기절은 감독의 지시 사항이었다.
끝없이 굴리고, 괴롭히고, 기절시키고 하다 보면 방어기술이 절로 는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 그만두거나 레슬링으로 종목을 바꾸는
친구도 있었다. 체력훈련도 육상선수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혹독했다. 동료를 메거나 안고 뛰는 건 기본이고 악력을 키우기 위해 밧줄까지
탔다. 모두 똑같이 하는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남자 신입생 중에서 가장 작은 1m48, 41㎏의 초등학교 4~5학년짜리 몸으로 버텨내기에는 너무도
가혹했다. 처음으로 나간 대회가 낙법 정도 겨우 익힌 시점에 열린 춘계연맹전이었다. 신입생의 출전은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선배 중에는 가장
낮은 체급인 48㎏급에 나설 선수가 없었다. 아예 결장하나 나가서 지나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 담력이라도 쌓게 하자는 분위기였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봐." 이게 감독의 유일한 주문이자 작전이었다. 체중까지 형편없이 밑도는 신출내기가 3학년하고 붙었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시작 사인이 나기가 무섭게 한판으로 날아갔다. 그 다음 대회도 마찬가지였고, 1년 내내 그 모양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한판'이었다.
개인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단체전에서 한 게임 차로 지기라도 하면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었다. 다들 48㎏급은 버린 게임이라고 했지만,
깨지고 나오는 선수 입장에서는 그렇게 간단히 털어 버릴 문제가 아니었다. 2학년이 되니 주위에서 슬슬 기대하기 시작했다. 꼬박 1년을 날아갔으니
이길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눈치들이었다. 하지만, 2학년 2학기까지도 여전히 1회전 한판이었다.
한데 2학년 말에 극단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어느 순간 상대를 잡으니 되게 가볍게 느껴지더라고요. 기술까지 먹히니 자신감이 확 생기데요.
그러다가 한 게임을 이겼어요. 그날 이후로는 아예 패배를 몰랐죠.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했습니다." 3학년이 되자 별명이 '점짜리'로 바뀌었다.
단체전 시작도 전에 이미 1점(1승)은 따 놓은 거나 다름없다고 해서 동료가 붙인 별명이다.
고2때부터 같은 체급 라이벌 국제무대 번갈아 제패 |
#2. 룸메이트 전기영
중3 때부터 몸이 크기 시작해 55㎏급으로 서울체고에 입학했다. 한창때라 그런지 풍선에 바람 들듯 눈에 띄게 몸집이 불어났다. 60㎏급으로
조정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65㎏급으로 올려야 했다. 투기 종목에서 체급 올리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일도 없지만, 올려도 당최 지지를 않았다.
기술이 수준급에 달해 있었다는 얘기다. 남들은 고교 3년을 거의 한 체급으로 뛰는데 자그마치 4체급을 누볐으니 헐크가 따로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운명의 라이벌을 만났다. 청석고 1학년 전기영이었다. 그와는 춘-추계연맹전, 협회장기, YMCA대회, 전국체전 등 매 대회
결승에서 충돌했다. 대학이 같았으면 체급 조정이라도 했을 텐데 하필 한양대와 경기대로 어긋나 라이벌 구도는 더욱 굳어졌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밀렸으나 대학 3~4학년 때는 내리 다섯 번을 이기기도 했다. 서로에게 진저리를 쳤지만, 사이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태릉선수촌에선 룸메이트였고,
유럽 원정을 가도 늘 같은 방에서 뒹굴었다.
둘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유럽연맹에서는 오로지 이들에게만 예외조항을 적용했다. 국제대회의 경우 개최국 외에는 체급별로 1명만 출전하게 돼
있는데, 이 규정을 깨고 78㎏급에 이들 둘의 출전을 허용한 것이다. 아니, 허용이라기보다 초청이라는 표현이 맞지 싶다. 그랬더니 번번이 결승
무대를 장식하며 각종 오픈대회 타이틀을 번갈아 가져갔다. 93년 독일오픈 윤동식 우승-전기영 준우승, 93년 파리오픈 전기영 우승-윤동식 준우승,
94년 독일오픈 전기영 우승-윤동식 준우승, 94년 파리오픈 윤동식 우승, 전기영 준우승.... 이런 식이었다. 이쯤 되자 국내외 지도자들이
이들 둘을 놓고 내기까지 벌였다. 94년 파리오픈 결승에서 전기영을 누르고 매트를 내려오는데 이경근 감독이 다가오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고마워 동식아. 밥값 벌었어."
경기 끝나고 호텔방에 들어서면 서로에게 축하와 위로의 말을 건넸고, 이따금 술도 한 잔씩 나눴다. 한번은 결승에서 진 전기영이 장난삼아 따지고
들었다. "형은 왜 그렇게 더티해? 이게 뭐 축구야? 다리를 왜 차?" 그러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받아넘겼다. "너 안 괴롭히면 업어치기로
날아가는데 그럼 가만 있냐?" 일단 도복 벗으면 형-동생으로 돌아왔다. 같이 놀러도 다니고 술도 마시고 그랬다.
96년 한국마사회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7년간 이어져 온 둘의 라이벌 구도는 깨졌다. 최고의 두 선수를 같은 체급에 두는 건 손해인 데다
평소 체중 감량에 애를 먹었던 전기영이 한 체급 올리면서 새 국면을 맞은 것이다.
2003년 코치로 국제대회 나가 선수로 출전 우승 |
#3. 유도왕을 거부한 올림픽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1위에 오르며 희망을 부풀렸지만, 최종 선발전에서 4위에 그쳤다. 96년 애틀랜타 때는 판정시비
끝에 조인철에게 출전권을 넘겨야 했다. 2000년 시드니대회를 노려봤으나 유성연과의 90㎏급 최종 결승에서 졌다. 태릉선수촌에서 외박을 나와서까지
아버지가 마당에 박아 준 통나무에 튜브 걸어 당기며 구슬땀을 쏟았건만 올림픽 티켓은 끝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2001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 90㎏급 동메달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해 마사회 코치로 들어갔다. 운동을 그만두고 선수들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다
보니 체중도 82㎏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2003년 몹시도 당혹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렸다.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감독이 난데없이 경기 한 번
뛰어보라는 것이었다. 선수 4명 데리고 리투아니아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때의 일이다.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는 데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극구 사양했지만, 감독은 뱉은 말을 되삼킬 마음이 없어 보였다. "가끔 선수들 상대해 줬으니 훈련은 돼 있을 거 아냐. 마침 81㎏급도 비었고.
놀면 뭐하냐. 나가면 출전수당도 주는데.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용돈이라도 벌어 가라." 도복을 안 갖고 왔다며 재차 물러서자 "까짓 도복이야
주최 측에 빌리면 되지 뭐가 문제냐"며 마저 밀어붙이더니 기어이 출전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바람에 용돈 좀 챙겼다. 거기서 우승을 한 것이다. 그해 전국체전에 나가 4연속 한판승 끝에 또 우승했다. 마침 이듬해가
아테네올림픽이었다. 팀과 언론에서 네 번째 올림픽 도전을 기정사실화하며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잇단 우승에 내심 자신감도 생겼다. 결국, 올림픽
예선에 출전해 최종 선발전까지 나아갔으나 아쉽게 5위에 머물렀다. 그때 나이 서른둘이었다. 체력이 거뜬해 좀 더 뛰어보자 싶었는데 정확히 그
무렵 매서운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코치가 자꾸 게임을 뛰어 선수들 다 죽인다'는. 아차 싶어 그 길로 도복을 벗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도복
대신 베개를 베기 시작했다. 징크스가 없어 바나나도 맘대로 먹고 시도 때도 없이 손발톱도 깎았으나 게임 잘 풀리는 도복만큼은 늘 베고 자던
그였다.
2007년 세계적 파이터 맨호프 꺾으며 이름 떨쳐 |
#4. 격투기 무대에 오르다
2004년 어느 날 채널을 돌리다가 케이블 TV에서 일본 유도영웅 요시다 히데히코를 봤다. 5만 관중이 지켜보는 프라이드 무대에서 주먹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순간 투쟁 본능이 꿈틀거렸다. '나도 저것 좀 해 볼까, 체력도 남는데.' 그러잖아도 더 큰 무대를 찾던 참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더니 프라이드 쪽으로 얘기가 흘러들어가 연말 '남제' 대회를 앞두고 초청장이 왔다. 호텔이며 자동차며 모든 걸 준비했고, 자리도 링 사이드로 잡아놨다. 4만8000 관중이 들어찬 사이타마 아레나에서 환상의 분위기에 푹 빠졌다. 화려한 영상, 뜨거운 열기, 분위기를 압도하는 폭죽.... 심장이 쿵쾅거렸다. 두려움보다 무대에 서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이튿날 곧바로 협상 테이블이 펼쳐졌고, 이런저런 조건들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자 데뷔전이 잡혔다. 2005년 4월 23일 프라이드FC 월드 그랑프리 16강전. 상대는 일본 최고의 격투기 스타 사쿠라바 카즈시였다. 4월 11일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7일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체력훈련 한답시고 동네 뛰어다닌 게 준비의 전부였다. 안일하고 소홀했다. 그냥 그렇게 몸만 좀 풀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 분위기는 장난 아니었다. '현역 시절 15전 15승의 일본인 킬러 윤동식이 또 하나의 일본인을 잡으러 온다'고 떠벌리며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었다. 결과는 초반 참패. 힘 한번 못 쓰고 주저앉았다. 주최 측의 상술에 녹아난 것이다.
데뷔전을 시작으로 내리 4연패. 패배보다 한국 팬들의 악플이 더 아팠다. 세기의 싸움꾼 퀸튼 램페이지 잭슨과의 3차전을 판정패로 버텨내자 악플이 선플로 바뀌기 시작했고, 2007년 LA 콜로세움에서 세계적인 격투기 스타 멜빈 맨호프를 암바로 꺾으면서 이름을 떨쳤다. 3만여 교민이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와 열렬히 응원했고, 링 사이드에선 니콜라스 케이지, 데니스 로드먼 같은 스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승리를 시작으로 4연승을 질주했다. "주먹에 대한 공포를 떨치는 데만 1년 넘게 걸렸습니다. 격투기는 연습을 제대로 못하는 게 어려운 부분이에요. 때리면 기절인데 연습하면서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된 연습이 안 되죠. 모든 스포츠가 실전과 같은 훈련이 가능한데 오로지 격투기만 안 그런 것 같아요." 어차피 결혼도 늦었고, 당분간 그럴 계획도 없어 5년은 더 뛸 작정이다. 그 화려하고 큰 무대에 '내 음악' 틀어놓고 입장하고, 세계적인 싸움꾼들과 대결을 펼치는 짜릿함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
격투기 하겠다고 했을 때 온 가족이 말렸다. 특히 어머니는 '막내아들 일본 가서 맞아죽는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빨리 장가나 가지 무슨 미련이 남아서 또 운동한다고 난리냐. 코치 하다 말고 올림픽(2004년 아테네) 나간다고 또 도복 입더니 이번엔 싸움하러 일본까지 가냐...." 이미 계약까지 한 터라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어머니를 속였다. 다 짜고 하는 거라 위험하지 않다고. 물론 거짓말은 얼마 안 가 들통나고 말았다. 2005년 오사카돔에서 열린 프라이드FC 월드 그랑프리 16강전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데뷔전서 샌드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놀란 건 당연지사.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근 20년 유도선수 아들을 뒷바라지한 배포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적응이 빨랐다. 2~3년 지나자 어머니는 "이제 조금씩 눈가에 살기가 돈다. 유도 할 때보다 훨씬 매서워졌어. 어차피 네가 선택한 거니까 정점은 찍고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전의를 돋웠다. ② 살벌한 게가드의 킥 2008년 6월 15일 요코하마 아레나. 종합격투기 '드림4' 미들급 그랑프리 2회전에서네덜란드의 강타자 게가드 무사시와 맞섰다. 게가드는 그 바닥에서 이름난 싸움꾼이었다. 초반에 나가떨어질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으며 접전을 벌였고, 1라운드 한때 주특기인 암바로 승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결과는 판정패. 게가드의 킥에 속수무책이었다. 시종 다리와 허리로 날아든 파괴력 넘치는 로킥과 미들킥에 하체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2라운드 공이 울렸는데도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걸음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5만 관중 앞에서 기권하고 내려오는 게 창피해 끝까지 버텼다. 게가드는 왼쪽 허벅다리를 집중적으로 노렸고, 같은 부위에 10회 정도 꽂히니 다리가 말을 안 들었다. 나중에는 게가드가 다리만 들어도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래도 근근이 버텨 판정패로 막았다. 지긴 했지만 수많은 관중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하게 퇴장했다. 그러나 라커룸 통로로 접어들어 관중의 시선이 걷히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야야, 나 좀 잡아라 나 좀." 순간 곁에 있던 후배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부축했다. 곧 죽어도 약한 모습, 못난 모습은 보이기 싫어 감각도 없는 다리를 용케도 끌고 퇴장했던 것이다. "말도 마세요. 라커룸까지 거의 업혀가다시피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얼음찜질하느라 보름간 꼼짝도 못했습니다. 킥 하면 아주 넌더리가 납니다." ③ 마저 꺾어야 하는데… 솔직히 때리고 맞는 게 싫다. 아직 싸움꾼으로 덜 여물었는지 직업에 역행하는 그런 마음이 자꾸 든다. 그래서 많이 맞으며 경기하는지도 모른다. 상대를 때려눕혀야 이기는데 타격 훈련 때마다 영 기분이 내키질 않는다. 죽기 살기로 치고받은 후 서로 부둥켜안고 수고했다며 인사하는 것도 맘에 안 든다. 천생 격투기 선수는 아닌 모양이다. 팬들이 '1분 못 넘길 것이다', '앰뷸런스 대기시켜야 한다'고 떠들었던 2006년 '프라이드FC 31 드리머스' 대회 미들급 최강자 퀸튼 램페이지 잭슨과의 경기도 마음만 모질게 먹었으면 이겼을 것이다. 잭슨 팔에 주특기인 암바를 걸었으나 마저 꺾으면 부러질 것 같아 머뭇거린 게 실책이었다. 부러질 것 같으면 상대가 항복하거나 심판이 말리게 돼 있는 것을. 아마도 유도부터 배워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답답해진 사쿠라바가 충고했다. "오늘 저놈을 죽여 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링에 올라야 이길 수 있어. 죽기 전에 심판이 말리니 걱정 안 해도 돼." 맞는 말이긴 해도 여전히 잘 안 된다. 늘씬하게 두들겨맞아 성질이 돋아야 모진 마음이 조금 생긴다. 아무래도 주먹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상대에게 상처 안 입히고 이길 수 있는 그라운드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멀었다. |
체격 1m83, 87㎏ 학력 서울당곡초→서울체중→서울체고→한양대→한양대 대학원 체육학 석사 유도 성적 92년 이탈리아오픈 우승, 세계주니어선수권 준우승/ 93년 오스트리아오픈, 독일오픈, 코리아오픈, 아시아선수권 우승, 파리오픈 준우승/ 94년 파리오픈, 오스트리아오픈, 굿윌게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우승, 독일오픈 준우승/ 95년 독일오픈, 파리오픈 우승, 오스트리아오픈 준우승/ 96년 오스트리아오픈 3위/ 97년 버밍험국제대회, 아시아선수권 우승/ 98년 영국오픈 우승/ 99년 코리아오픈 우승/ 2000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2001년 오사카 동아시아대회 우승, 뮌헨 세계선수권 3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