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사다리가 무너지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구조조정이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군살을 뺐다. 정부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겠다'고 했지만, IT 산업이 끌고 가는 새로운 열차가 들어왔을 때 기존 직장에서 밀려난 국민 대다수는 여기 올라타지 못했다."
"기차에 못 탄 것이 당사자 탓일까. 새로운 열차에 탈 힘과 기회를 길러주는 게 국가의 역할인데…."
봇물 터지듯 격론이 쏟아져 나왔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자문단은 갈수록 '상승의 사다리'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에 대해 "한국사회가 활력을 잃기 전에 빨리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난상토론엔 김경근 고려대 교수(교육학)·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경제학)·노대명 사회통합위원회 전문위원(정치사회학)·박명수 고용정보원 연구개발본부장(노동경제학)·박신영 토지주택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시행정학)·서병수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장(사회복지학)이 참여했다.
―1970년대까지는 국민 대부분이 가난했다. 취약계층도 있었지만, 국가 경제가 성장하면서 대다수의 경제적 지위가 상승했다. 외환위기 이후 가난의 양상이 변했다. 우리 국민 절반 정도가 한번씩 빈곤을 경험했다. 이들 중 절반은 빈곤이 장기화돼 사다리를 올라갈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현상을 막을 장기 대책도, 단기 대책도 없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여러 가지 갈등의 밑바닥에는 '빈곤'과 '사다리 붕괴' 문제가 깔려 있다. 왜 가난이 장기화될까? 육아·교육·취업 등 삶의 모든 단계에서 저소득층이 사다리를 올라갈 방법이 없다. 현재 빈곤선 밑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100만명 정도 된다. 거칠게 말하면 어려서는 방치되고 커서는 스펙(자격조건)이 안 좋아 취업이 안 된다. 산업구조가 개편되면서 육체노동으로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는 자꾸 줄어든다. 일할 수 있는 기간도 짧아져 50~60대까지 쭉 돈 벌기 힘들다.
―과거엔 대학 졸업하면 취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 졸업 후 1년6개월 안에 상용직(계약기간 1년 이상의 일자리)으로 취업한 사람이 64%밖에 안 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다시 조사해도 70%가 안 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 졸업 후 임시직·단기 계약직으로 출발하지만 기업은 이들의 교육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 젊어서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하니까 나이 먹어서 소득이 올라갈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된다.
―학생들은 절망적이다. 열심히 하는데 취업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취업해도 1~2년 안에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는 교육이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가정 배경이 학업 성취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진다. 이제는 교육이 희망을 주기보다 절망을 주는 단계에 와 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악전고투 끝에 희박한 확률을 뚫고 명문대에 진학해도 '대입 이후'가 해결되지 않는다. 외환위기 이후 조기유학 붐이 불어 중산층 이상 자녀는 국내 대학보다 외국 명문대 직행을 선호하고, 국내 대학에 진학해도 영어학원 다니고 해외 연수를 떠난다. 고용정보원 통계를 분석해보니, 중·고교 때 사교육보다 대학 다니며 해외연수 다녀온 경험이 취업에 훨씬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이 사다리 역할을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계층 고착화' 장치가 된 것이다.
―취업 이후도 문제다. 지난 15년간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근로시간은 늘고 임금은 줄었다. 과거에는 전체 근로자 중 25% 정도가 대기업에 다녔지만, 지금은 12%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소기업 다니면서 옛날보다 더 일하고 덜 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기업에 취직해서 나중에 중소기업으로 옮기는 경우는 많아도, 중소기업에서 출발해 대기업으로 옮기기가 너무 힘들다. 기업에서 사람 뽑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세세하게 보는 것도 아니고 결국 토익 점수 등 몇몇 공식적인 자료를 근거로 삼는다. 그러니 학생들이 기를 쓰고 대기업 가려고 스펙을 쌓는 것이다.
―연봉 10년치를 한푼도 안 쓰고 모아야 평균적인 주택을 살 수 있다. 무리해서 집을 샀다가 실직·질병 등 위기가 와서 집을 잃으면 가족이 붕괴한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연령대별로 분석해보니 45살 이전에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근로소득으로 집을 사는 게 어렵다. 바꿔 말해 자기 힘으로 계층 상승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집이 있어야 가계가 안정되고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데,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토록 소중한 '내 집'을 갖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니 주위에 행복한 사람이 적다. 현재 40대들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삶의 질에 대해서도 앞선 세대보다 눈높이가 높다. 그런데 그걸 성취하기가 힘들다. 집사고 자녀들 과외시키는 데 소득 대부분을 쏟아붓는 집이 많다. 부모 세대는 남들 다하니까 할 수 없이 사교육 경쟁을 하면서도 내심 노후가 불안하다. 자녀 세대는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까지 부모에게 기대서 도약하려고 한다. 엘리베이터에 비유하면, 과거에는 엘리베이터가 좁고 삐걱거려도 자주 왔는데 지금은 고속 엘리베이터가 쭉 위로 올라가더니 아래로 안 내려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느낌이 있고 그게 박탈감으로 이어진다.
―한 일본 기자가 내게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고속성장과 민주화를 거치면서도 갈등이 폭발하거나 소요 사태가 벌어지는 일 없이 지금 단계까지 왔다.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답이 '계층 이동'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농민도 소 팔아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면 최소한 다음 세대는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일자리가 대량 창출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대이동했고 그중 상당수가 전보다 낫게, 부모보다 낫게 살았다. 또 급속한 공업화로 도시 근로자 소득이 올라갈 때 농촌에서도 마을 길 넓히고 주택을 개량하는 새마을운동이 벌어졌다. 도시와 농촌 간에 극단적인 갈등이 생기는 걸 막아줬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되는 점이 적지 않다.
―의식 조사를 해보면 30대가 엄청나게 불만이 많다. 40대는 대학 나오면 취직은 됐다. 30대는 외환위기 여파 등으로 취업이 안 되는 상태에서 부동산 가격까지 엄청나게 올랐다. 앞선 세대들이 누린 혜택을 못 누렸는데도, 앞으로 고령화가 진행되면 앞선 세대들을 부양하느라 막대한 부담을 져야 한다. 이들을 배려해야 한다. 소득이 낮은 계층, 젊은 계층에 보다 많은 기회를 주도록 정책을 짜야 한다.
―결국은 교육과 일자리다. 먹고사는 게 해결돼야 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만 매달리지 말고, 비어 있는 일자리에 알맞은 사람이 찾아가게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다. 젊은이들에게 "취업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뭐냐"고 물으면 "정보가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일자리 '중매' 사업이 중요한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 방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공립이건 사설이건 '기관'을 통해 일자리 찾았다는 사람이 100명 중 6명꼴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인맥·입소문·교수의 추천 등으로 일을 찾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지만 독일에서는 오히려 고용이 증가했다. '독일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독일은 고용지원센터 상담원 1명이 구직자 500명을 담당하는데 우리나라는 상담원 1명이 구직자 8000명을 담당한다. 독일은 상담원이 구직자와 40~50분 면담하며 성향·특기 등을 세세하게 파악해 일자리를 찾아주지만 우리는 심한 경우 2~3분 만에 뚝딱 상담하면 끝이고 그나마 지원센터에 풍부한 정보도 없다.
―'낚시법 알려줬으니 낚시 하라'에 그치면 안 된다. 물고기(일자리)가 많아져야 하고, 물고기가 다니는 길목도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줘야 한다. 그게 사다리를 세우는 진짜 고용 지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