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용의 즐거운 와인세상 9] 크로아티아에 대해 꼭 알아야 할 10가지
동유럽에 자리한 발칸반도는 로마와 투르크 제국 간의 격전지, 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 등 문명과 민족간의 끊임 없는 충돌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산업화의 뒤안길에 있었던 덕분에 희귀 동식물 군락이 남아 있어 오늘날 대자연의 웅장함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발칸 반도의 서부에 자리 잡은 크로아티아는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마주하는 해안이 아름다워 전세계 관광객이 몰려온다. 게다가 오랜 와인 음용의 역사와 양조의 전통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다.
여행지의 다변화를 모색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다양한 와인 세계를 경험하고픈 애호가들에게 크로아티아에 대해 꼭 알아야 할 10가지를 소개한다.
1. 넥타이와 만년필을 맨 먼저 사용한 나라
크로아티아인들이 세계 최초로 넥타이를 착용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은 만년필도 역시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맵시 있게 넥타이를 걸치고, 멋지게 만년필을 휘갈기는 그들은 와인 음용도 고수 급이다. 매년 1인당 35L의 와인을 마셔, 프랑스인나 이탈리아인에는 못미치지만 독일인보다 와인을 더 많이 마신다고 한다.
2. 동유럽의 축구 강호
크로아티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우리처럼 온 국민이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강하고, 축구 선수로부터 국민들은 활력을 얻는다.
슬라보니아 지방의 와인 산지 쿠테보(Kutjevo)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는 안툰 아드치츠(Adzic)의 아들은 크로아티아 국민들이 사랑했던 전직 국가대표 축구 선수다. 안툰의 그라슈비나(Grasevina, ‘웰쉬리슬링’의 크로아티아식 표현)는 내가 맛본 최고의 그라슈비나였다.
3. 마르코 폴로의 고향
크로아티아는 '동방견문록'을 남긴 상인 마르코 폴로를 품고 있다. 코르출라(Korcula) 섬에 가면 마르코 폴로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다.
당시 베니스가 호령하던 시절이라 마르코 폴로가 이탈리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태어난 곳은 코르출라 섬이 맞다고 마르코 파브락(Marko Pavlak)이 강조했다. 그는 양조장 코르타 카타리나(Korta Katarina)의 마케팅 담당자다. 그는 판로가 개척되어 마르코 폴로처럼 전세계를 다니고 싶어한다.
크로아티아는 아름다운 아드리아해의 대부분을 소유할 정도로 해양에 역사를 둔 나라다. 그래서 해양 레저의 꽃인 요트가 많고, 성수기인 6월부터 10월까지 관광객들이 넘친다. 마르코 폴로의 생가에서 마시는 와인은 포십(Posip)이 좋다. 섬에서만 나는 토착 청포도로, 특유의 열대과일 향기가 매력적이다. 잘 익은 오렌지, 자몽, 복숭아 향기가 합쳐진 것 같다.
생가 바로 옆에 있는 호텔 레시츠 디미트리(www.lesic-dimitri.com)는 마르코 폴로의 여정을 따라 행선지 별로 테마룸을 설치하여 손님을 맞이하는 고급 호텔이다.
4. 해안에 머물 때에는 캡틴 하우스가 좋다.
이는 '선장의 집'을 말한다.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남자는 10살이 되면 배를 탄다. 그는 망망대해를 떠돌면서 뱃일을 거든다. 불굴의 의지를 지닌 소년은 곧 일에 익숙해 지고 뱃일에 잔뼈가 굵어 선장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집을 짓고 윤택하게 여생을 보내는데, 그 집을 캡틴 하우스라고 한다.
캡틴 하우스는 해변 언덕에 있어서 바다를 보는 전망이 좋고, 마당도 있고 건평도 넓어서 부의 척도로도 쓰일 정도. 하지만 애석하게도 선장 사후에 가족들이 저마다 소유권을 주장하며 독차지하려는 바람에 법적 분쟁이 끊이질 않아 어떤 가족 구성원도 들어가 살지 못한다.
상속이 순조롭게 이뤄진 캡틴 하우스는 주로 관광객에게 주단위로 임대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양조장 코르타 카타리나의 책임자 제프 리드(Jeff Reed)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전주를 할 때, 마당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코 앞에 있었다. 지나다니는 페리는 손에 잡힐 듯 했고, 뱃고동 소리는 참 운치 있었다.
5. 유럽의 오크통 주산지 슬라보니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동쪽으로 200킬로 떨어진 쿠테보에는 양조장 블라도 크라우타커(Vlado Krauthaker)가 있다. 그는 왕년에 핸드볼 선수였으며 유고연방에서 독립하던 해에 국가 양조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양조장을 설립하였다. 그는 양조가들 중에서 국제적 지명도가 남다른 수준에 올라 있으며, 수십 개국에 와인을 수출할 정도로 판로가 열려 있다.
크로아티아 내륙에서는 청포도인 그라슈비나를 많이 재배한다. 양조장에서는 발효 후에 오크통에서 숙성을 하는데, 주변에 오크 나무가 흔하게 자라 포도와 오크통까지 지역산을 쓸 수 있어 좋다고 블라도는 말했다. 이탈리아 양조장에는 슬라보니아산 오크통을 많이 쓴다.
혹시 그게 슬로베니아산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건 틀린 말씀. 슬로베니아는 이웃 나라이며, 슬라보니아는 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으로 유럽 와인산지 전역으로 오크통을 수출한다.
6.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
애완견을 두고 있지 않아도 한번쯤 봤음직한 만화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 그 개들의 고향은 다름아닌 크로아티아 달마티아(Dalmatia) 지방이다. 달마티아는 서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해안 지역을 아우르는 지방으로 유려한 항구와 럭셔리한 요트, 그림 같은 풍경, 옥색의 바다로 유명하다.
마르코 폴로의 고향 섬도 달마티안 지방에 속한다. 이 나라 국기를 흑백으로 처리하면 가운데 드러나는 문양이 꼭 이 점박이 개와 비슷해 보인다.
7. 두브로브니크를 들리지 않으면 지중해 크루즈가 아니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은 일찍이 바이런에 의해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렸던 해안 도시로, 베니스와 경쟁한 도시 국가였다. 크로아티아를 크로아티아답게 만드는 것이 두브로브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자그레브에 거주하는 와인 저널리스트 니코 쥬칸(Niko Dukan)은 말한다.
문필가 버나드 쇼 역시 도시의 풍광을 이렇게 표현한다. “지상에서 파라다이스를 찾으려 한다면, 두브로브니크에 와봐야 한다.”
도시 국가의 융성은 단단한 안보 바탕 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두브로브니크는 성채 도시다. 주변을 높다란 성곽이 둘러 싸고 있다. 또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성안에 있다.
두브로브니크 북쪽 해안의 15km는 보스니아 영토다. “이웃에게 바다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국토 양허를 결정한 것”이라고 니코가 설명했다. 국제공항이 있는 자그레브나 스플리트에서 이 곳으로 올 때에는 보스니아 영토를 거쳐야 한다. 두브로브니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8. 이탈리아 같은 이스트라
크로아티아 북서 해안 지방 이스트라(Istra)는 이스트라 반도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그 바로 위로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트리에스테가 있어 아무래도 이탈리아의 영향이 많은 곳이다. 주민들이 쓰는 방언이 이탈리아어와 비슷하며 누구나 쉽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한다. 이탈리아에서 식재료로 쓰는 송로 버섯인 '타르투포'가 많이 출토되어 파스타나 리조토에 곁들여 먹는다.
청포도 말바지아가 많이 재배되며, 검은 포도 테란도 있다. 지역와인단체 비니스트라(VINISTRA)의 회장이자 마토세비치 양조장 오너인 이비카 마토세비치(Ivica Matosevic) 박사는 “700년 전 베니스 제국의 최고 와인은 말바지아였다”고 했다.
이스트라 북부에 있는 휴양도시 우막(Umag)은 바닷가에 테니스 경기장을 조성하여 세계프로테니스협회(ATP)의 순회경기를 치르는데, 아주 가끔 공이 바다까지 날아간다.
9. 파란 나라를 보았니? 진판델의 고향 딩가츠
크로아티아 레드 와인의 명산지 중남부 달마티아에는 멋진 풍광을 지닌 와인 산지 페제샤츠(Peljesac)가 있다. 페제샤츠는 육지에서 약 60km 북서쪽으로 뻗어 나온 작은 반도다. 포항의 호미곶을 마치 도깨비가 혹부리 영감의 혹을 늘이듯 길게 잡아늘인 모양 같다. 페제샤츠에 이름난 포도밭으로는 딩가츠(Dingac)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진판델의 고향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만개한 진판델은 한 때 미국산이라고 여겨지며 미국 와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지만, 정작 이 포도 종자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최근 들어 진판델은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방의 츨레낙 카슈테란스키(Crljenak Ka?telanski, 이하 츨레낙)와 이탈리아 풀리아 지방의 프리미티보랑 동일한 DNA 구조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딩가츠의 포도는 츨레낙이 아니다. 밭은 온통 플라바츠 말리(Plavac Mali)로 가득하다. 오래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츨레낙은 딩가츠에서 사라졌고 그 대신 유전학적으로 그의 아들 세대인 플라바츠 말리만 밭에 남게 되었다.
오레비츠 마을에서 만난 마리아 므르구디츠(Marija Mrgudic)는 1600년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보여주면서 자신은 12대째 와인을 만든다고 했다. 물론 플라바츠 말리로. 그녀는 몇 년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진판델을 들여 와 새 포도밭에 심었다. 미국으로 몰래 떠난 진판델을 꼭 고향으로 데려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포도 나무는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깊은 수심의 물은 파란 색을 띠며 해안으로 갈수록 옥색으로 맑아져 마치 미술도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10. 항아리 와인
태초의 와인처럼 와인을 만들고 싶은 양조가가 있다. 자그레브 서쪽에 위치한 와인 산지 플레시비차에 가면 이집트 유물 같은 항아리로 와인을 만드는 곳이 있다. 토미슬라브 토마츠(Tomislav Tomac)는 그루지야 장인이 만든 대형 항아리(amphora)를 들여다 발효조를 삼는다.
사람 키보다 더 큰 항아리를 땅에 묻은 후 거기에 포도를 던져 넣고 봉하면 작업은 끝이다. 서늘한 땅에 묻힌 항아리 속에서 발효는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이는 태초에 만든 와인과 가장 흡사한 방식이지만 고대 와인의 재현이라는 집념에 사로잡혀야 관심을 두게 된다. 첨단 양조기술 위에 좀더 나은 기술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양조가들에게는 고리타분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 조정용은
국내 최초의 와인 경매사이자 와인 저널리스트. 국내 와인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올 댓 와인'의 저자다. 1년의 3할 이상을 세계 와인명가 탐방에 투자하며 자료를 모으고, 직접 맛을 본 느낌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와인을 두려워하는 독자들에게는 용기를,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평을 받는다. 고려대에서 ‘포도주 개론'을 강의한다. 저서로 ’올댓와인‘, ’올댓와인2‘와 ’와인이 요리를 만났을 때‘(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