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나라 장수 항우가 진(秦)나라 군대를 치러 갈 때 일이다. 항우는 사흘치 식량만 챙기고 솥(釜)은 다 깨뜨리라고 부하들에게 명했다. "솥이 없어야 우리가 가볍게 이동해 적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가 이긴 뒤 진나라 솥으로 밥을 해먹으면 된다." 항우는 부대가 장강을 건너자 타고 온 배(舟)도 모두 물에 빠뜨렸다. 병사들은 죽기 살기로 싸워 큰 승리를 거뒀고 파부침주(破釜沈舟·솥을 깨고 배를 빠뜨린다)라는 고사성어도 탄생했다.
▶허정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전을 앞두고 '파부침주'라는 말로 배수진을 쳤다. 패하면 끝장이다. 1대0으로 이겨도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2대0으로 이기면 골득실차로 탈락한다. 한국이 비기면 여러 '경우의 수'가 국민의 애간장을 태운다.
▶한국 축구는 지금껏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항상 '경우의 수'를 놓고 오르락내리락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스페인에 0대3으로 패했다가 멕시코와 칠레를 각각 1대0으로 이겨 2승1패를 거뒀지만 골득실에서 밀려 조3위로 떨어졌었다. 2002월드컵에서도 폴란드를 2대0으로 이겼지만 미국과 1대1로 비기는 바람에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경우의 수'를 따져야 했다. 다행히 박지성의 골로 포르투갈을 이겨 '꿈★은 이뤄진다'는 4강 신화로 이어졌다.
▶충무공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 '신(臣)에게는 아직 배가 12척이 남아있고 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고 했다. 충무공은 부하들에게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며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비장하게 격려했다.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 출사표를 던지며 '유쾌한 도전'을 약속했었다. 첫 승리로 산뜻하게 출발했던 한국 축구는 이제 나이지리아전에서 일자진(一字陣) 정신으로 맞서야 하는 처지가 됐다. 충무공은 일자진을 쳤다가 적이 몰려오면 학이 날개를 편 듯한 학익진(鶴翼陣)으로 포위해 승리를 거뒀다. 한국 축구팀도 개인기가 좋은 아프리카 선수들을 협력수비로 감싸고 역습해 골을 넣는 길밖에 없다. 물러설 곳이 없다. 솥도 배도 없는 한국 축구가 '뻥축구'라는 오명을 씻고, '경우의 수'라는 고질병에서 벗어나는 '유쾌한 도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