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3월 말, 영국 남서부 해안의 작은 마을 라임레지스. 그 황량한 바닷가에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방파제 끝에 서 있는 또 한 여인. 이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숨 막힐 듯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왠지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이 사건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도, 오늘의 작은 의혹이 과거의 커다란 참사를 불러내고, 이곳의 조용한 몸짓이 저곳의 소란한 움직임과 얽힙니다.
마을은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잠들지 못하는 염탐과 호기심의 눈초리들이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습니다. 작가는 그 눈길들의 행적을 좇으며, 마침내는 대영제국이 가장 융성했던 19세기 후반, 즉 빅토리아 시대를 진단하고, 그 시대의 풍습과 정신 속에 잠재해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드러내 보입니다.
작가의 시선은 외딴 시골의 부엌에서 런던 도심의 환락가까지 걸쳐 있고, 그의 성찰은 역사적 현실의 길목에서 일상적 심리의 미로까지 넘나들고 있으며, 그의 문체는 영상적 묘사에서 현학적 담론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고전적인 것에서 가장 전위적인 것까지, 문학사를 형성해온 갖가지 소설론과 기법들이 작가의 장인적 솜씨 안에서 찰흙처럼 주물러집니다. 그에게 소설은 스스로 증식하고 변형하는 유기체이며, 등장인물들은 살아 있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유에 구속당한 실존적 존재들인 것입니다.
영화 장면들처럼 교차되며 이어지는 줄거리를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는 그토록 찬란한 시대의 겉모습 속에 숨겨진 각양각색의 갈등을 만나게 되고, 그러한 갈등들이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고 해체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상전과 하인, 부자와 빈자, 아버지와 아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창조론과 진화론, 도시와 농촌, 자유와 억압, 과거와 현재, 타락과 구원, 사랑과 미움, 그리고 남자와 여자―그렇습니다, 이 소설은 필경 두 남녀가 펼치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 치열한 로맨스의 중심에는 프랑스 해군 장교와 밀통했다는 소문과 함께 '프랑스 중위의 여자'(좀 더 실감 나게 번역하자면 '프랑스 중위 놈과 놀아난 년')라고 놀림 받는 가정교사 사라 우드러프와 귀족 출신의 아마추어 고생물학자 찰스 스미스선이 있습니다.
찰스는 부유한 사업가의 외동딸 어니스티나 프리먼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나 우연한 첫 대면 이후 찰스는 사라의 신비로운 매력에 이끌린 나머지 동정과 애정을 오가며 갈등합니다. 이런 찰스를 사라는 수수께끼 같은 언행으로 움직여,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사회적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중상과 모략이 사라를 덮칩니다. 사라는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 엑서터로 떠나고, 여기서 두 사람의 연애는 절정에, 그러나 새로운 전환점에 이르게 됩니다. 찰스는 죄책감과 의무감 때문에 어니스티나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사회적 명예와 밝은 미래를 포기하는 대신 사라와의 사랑을 택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 직후 사라는 종적을 감추고 맙니다. 몇 해가 지난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여기서 작가는 세 가지 가능한 결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플롯의 마지막 출구를 열어둠으로써 소설의 운명―즉 주인공들의 운명을 독자들의 선택에 맡기고 있는 것이지요. 그 열려 있는 지평에 이 소설의 자리가 놓여 있습니다(이 작품은 2005년 10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에 뽑혔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세 번(1982년, 1997년, 2004년) 번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