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도, 능력도 ‘별 볼 일 없는’ 주인공은 뜻밖의 귀인을 만나 기술을 연마해 사람들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영웅이 된다.”

기이한 출생 부분만 제외하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이러한 영웅신화의 고전적인 플롯을 철저하게 따른다. 주인공 ‘히컵’은 바이킹 족장의 아들이지만 용을 무서워하고, 방패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모습으로 주위의 실망을 산다. 그는 한쪽 꼬리날개를 잃은 ‘투슬리스’를 만나게 되면서 용의 훈련방법을 터득하고, 다른 용들을 지배했던 ‘거대 용’을 물리치면서 마을에 평화를 가져온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다음 장면을 예상할 수 있다.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에서는 간결한 스토리를 역으로 이용해 관객들이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라 전달하는 메세지, 그리고 그래픽에 빠져들게 한다.

주인공은 ‘두려움’으로 투슬리스와 교감한다. 밧줄로 묶여 있는 투슬리스를 본 히컵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용을 죽여야 하는’ 바이킹족으로서 그를 죽이려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투슬리스의 눈에서 두려움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본다. 인간을 두려워하는 용, 그리고 용을 두려워하는 인간. 둘은 같은 공포를 마주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영화는 투슬리스와 히컵의 교감으로 공포의 원인이 단순히 소통의 부재였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단순히 용과 인간의 소통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소통까지도 포함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에는 모든 용에 대해 ‘위험하니 바로 죽일 것’이라고 씌어 있고 어른들에게는 용을 죽이는 것이 최고 가치다. 히컵이 아무리 ‘제 말 좀 들어보세요!’라고 소리쳐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미 정형화된 틀이 있고, 아이들이 그 틀에 꼭 맞게 자라나도록 아이들을 교육시킬 뿐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소통 부재의 문제가 ‘희생’을 통해 해결된다. 거대 용과 인간과의 전쟁에서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히컵은 투슬리스와 함께 날아오른다. 족장은 아들에게 말한다. ‘너가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아빠와 아들의 소통이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자, 자신들의 적인 용에게 손을 내밀었던 아들을 바이킹족으로서 인정하는 순간이다.

거대 용은 물리쳤지만 추락한 투슬리스의 품에서 히컵을 보는 순간 그는 ‘고맙다’며 눈물흘린다. 용은 반드시 적대시해야할 동물이 아니며, 그들에 대한 이해를 할 시도가 부재해 그들을 오해했다는 것을 족장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현실적인 메시지를 던지는데, 깨달음에는 항상 대가가 수반한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투슬리스가 자기 방에 있는 걸 본 히컵은 기뻐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자신의 한쪽 다리가 의족임을.

영화는 무난한 흐름 속에 이러한 충격을 심어 놓음으로써 관객들에게 이러한 문제를 단순히 영화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각해보게 한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어떤 희생을 야기하고, ‘다리 한 쪽’으로 표현된 희생이 현실상으로는 무엇인지.

히컵과 투슬리스가 대면하는 부분에서 히컵은 투슬리스에게 한쪽 꼬리날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임시 꼬리를 만들어주는데, 그에 올라탄 히컵은 자신의 발로 꼬리의 방향을 조종하면서 투슬리스를 날아오르게 한다. 따라서 히컵의 한쪽 다리의 상실은 관객들에게  투슬리스의 잃어버린 한쪽 꼬리날개를 떠오르게 하고, 의족과 한쪽 꼬리날개를 연결해 하늘을 나는 장면으로 서로의 결핍이 서로에 의해 채워졌음을 보여준다. 히컵이 투슬리스에게 만들어준 의미(義尾)를 통해 그들은 서로에게 의미(意味)있는 존재가 된다.

인물의 머리카락이 하나하나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실감나게 표현할 정도로 3D의 입체감도 좋았고, 투슬리스와 히컵의 비행신은 마치 비행시의 바람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4D가 아니더라도 영화는 관객들에게 충분한 실감과 입체감을 제공했다.

영화가 드문 ‘전체 관람가’인만큼, 어린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보면 좋은 영화일 듯싶다. 아이들에게는 재미와 감동을, 어른들에게는 그들에게 부재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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