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호는 의미 있는 역사를 참 많이 만들고 다녔다. 성남 문원중 3학년 때 경기도에 소년체전 사상 첫 레슬링 금메달을 안겼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는 한국에 첫 금메달을 선사했다.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맞은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그레코로만형 48㎏급 우승으로 한국 올림픽 사상 100번째 메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96년 애틀랜타와 2000년 시드니 올림픽(그레코로만형 54㎏급) 우승으로 레슬링 사상 첫 2연패 및 2체급 석권의 위업도 달성했다. 남들은 꿈도 못 꿀 그랜드슬램(아시아선수권,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올림픽 우승)을 48㎏급과 54㎏급에서 모두 이뤘다. 가히 레슬링의 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사람들은 강력한 능력을 지닌 덩치 작은 이를 가리켜 '작은 거인'이라고들 한다. 심권호야말로 진정 '작은 거인'이 아닐까 싶다.

#1. 못 말리는 개구쟁이

코흘리개 시절부터 잠시도 가만있질 못했다. 동네방네 싸다니며 남의 집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고, 돌 던져 유리창 깨고.... 주체할 수 없는 장난기에 느긋하게 걷지도 못해 늘 뛰어다녔다. 개구쟁이도 그런 개구쟁이가 없었고, 사고뭉치도 그런 사고뭉치가 없었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집에 붙어 있질 않았으니 하루가 멀다고 뭔 일을 저질러도 저질렀다. 노는 모양새 봐서는 커서 뭐가 돼도 될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별났다.

문원중학교에 들어가 온 학교를 훑고 다니다 구석진 교실에서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여러 아이가 얄궂은 옷을 입고선 연방 돌리고, 던지고, 뒤집고 그랬다. 한눈에 운동부라는 건 알았으나 태어나 처음 보는 장면이라 무슨 운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재미난 걸 구경하기 위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 교실에 창틀에 매달렸다. 타고난 개구쟁이가 중학생 됐다고 별다를까. 특히 체육시간에는 아주 살판났다. 선생님 눈에 띈 건 당연지사. 그렇게 설쳐대니 눈에 안 띄는 게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하루는 장난치다가 체육 선생님에게 딱 걸렸다. 한데 야단은 안 치고 그 이상한 교실로 오라는 게 아닌가. 작지만 날래고, 운동신경 특출난 데다 꾀도 보통이 넘어 레슬링에 제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거기서 발목 잡힌 거죠. 안 하겠다 소리할 수 없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처음엔 재밌더라고요. 사람 잡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니까요. 그 바람에 속은 거예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툭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코 꿰인 거죠. 레슬링이 직업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얼마 후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을 때 죽을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버스 떠난 후였다. 훈련을 거듭하면서 자꾸 후회가 생겼다. 무엇보다 신나는 방학을 땀으로 채울 때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러 번 포기를 결심했고, 두어 번은 그만두겠다고 얘기도 했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매일 한두 번은 도망갈까 말까 고민했다고 하니 그 고통이야 세세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애초 운동을 반대하던 부모님도 성남시 대회, 경기도 대회에 나가 심심찮게 상장을 따다 나르는 아들이 대견해 더는 말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어금니를 다시 물었고, 중3 때인 87년 부산 소년체전 자유형 32㎏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내면서 안정을 찾았다. 그 메달이 소년체전 사상 경기도가 레슬링에서 차지한 첫 금메달이었다.

#2. 레슬링의 달인

레슬링은 즐기지 않으면 참 괴롭고 힘든 운동이다. 머리부터 손가락, 발가락까지 다 쓰는 전신 운동이기에 어느 한 군데 다쳤다고 해서 쉬는 법도 없다. 팔 다치면 반대편 팔과 다리운동을 해야 하고, 다리 다치면 상체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단련할 데가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 주로 2인-1조로 하는 훈련만 보면 참 재밌다. 사람 들어 돌리기, 사람 메고 달리기, 사람 안고 달리기, 무동 태워 달리기.... 뭘 해도 사람을 도구로 쓴다. 심지어 허리 운동도 사람 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훈련하는 선수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다른 종목 선수들이 '무식한 운동'이라며 두려워할 정도다. 그만큼 강도가 세다. 오죽하면 사람이 할 운동이 아니라고들 할까. 문제는 그렇게 죽을 고생 하고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다.

"한국체대 신입생이던 91년까지 자유형으로 뛰었어요. 고3 겨울에 대표선수로 뽑혀 태릉선수촌에도 들어갔지만 뭔가를 보여주지는 못했죠. 어느 날 교수님이 '아무리 봐도 그레코로만형 체질'이라며 전환을 권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저는 상체가 발달한 데다 큰 기술을 잘 썼거든요. 그래서 바꿨죠. 불안한 미래에 대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요." 이듬해 겨울 그레코로만형 48㎏급 대표선수 1차 선발전에 나가 우승했다. 하지만, 반응들은 영 신통찮았다. 잠시 반짝일 거라고들 했다.

그 체급엔 91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 권덕영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예상들이 멋쩍게 사그라지는 데는 불과 얼마 안 걸렸다.

그레코로만형으로 처음 출전한 93년 스웨덴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땄다.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6경기에서 무려 62점을 얻었다. 러시아 선수와의 준결승에서 2점밖에 못 얻어 졌을 뿐 나머지 5경기에서 60점을 따냈다. 거기서 뜻밖의 '테크닉상'과 함께 자신감도 가져 왔다. '그레코로만형에서도 통하는구나' 하는. 그리고 거침없이 세계무대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우승, 95년 체코 세계선수권 우승,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우승....

한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여자 레슬링이 추가되면서 체급에 변화가 생겼다. 48㎏급이 없어지고 54㎏급이 생긴 것이다. 52㎏급 선수들이야 아무 문제 없고, 57㎏급 선수들은 체중 좀 빼고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48㎏급이었다. 설사 체중을 늘린다 해도 파워가 그만큼 따라줄 리 만무하기에 사실상 그만두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결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심권호와 북한의 강용균만 빼고 그 체급 선수가 다 은퇴했다.

"사람 적응력이란 게 참 무섭더라고요. 죽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독하게 어금니 물고 하니까 되더라고요."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그레코로만형 54㎏급 금메달을 계기로 다시 무섭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98년 스웨덴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에 이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또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두 체급에 걸친 그랜드슬램의 대업을 완성했다. 레슬링 해 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3. 털북숭이와 만나면

레슬링만큼 상대와 몸을 비비대는 스포츠도 없다. 경기 자체가 몸싸움이다. 유도나 씨름도 몸싸움이 기본이지만, 유도는 도복을 입는 데다 씨름도 닿는 부위가 한정적이다. 반면 레슬링은 신체 모든 부위가 상대와 닿는다. 게다가 경기복도 중요 부위를 가리기 위한 '쫄쫄이 핫팬츠'에 그걸 붙들기 위한 어깨 끈이 전부다. 그러니 상대가 참 중요하다. 대부분 경기는 상대의 전력과 기술 따위만 신경 쓰면 그만이지만 레슬링은 상대의 신체적 특징이라는 독특한 요소가 추가된다.

93년 히로시마 아시아선수권대회 때였다. 승승장구 끝에 결승에 오르고 보니 상대가 무명의 인도 선수였다. 흔히 하는 말로 이변이 없으면 금메달이었다. 한데 경기 직전 악수하면서 이미 심적인 컨디션이 무너졌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데다 다가가자 냄새가 아주 역했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냄새나 털 따위에 마음 뺏길 여유도 없지만, 일단 시작도 전에 잡신경을 써야 한다는 게 불쾌했다. 결과는 패배. 만에 하나라고 여겼던 이변이 일어났다. 기가 막혔다. 털 때문에 졌다고 하면 웃음거리 될 것 같고, 냄새 때문에 기량 발휘 못했다 해도 바보 취급당할 게 뻔해 말도 못하고 생가슴을 쳐야 했다. "털북숭이는 정말 짜증납니다. 털이 저보고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온몸을 문대며 게임 하다 보면 입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얼굴을 털에 묻고 문질러야 하는 일은 허다하고요. 기분 좋을 리 만무하죠. 그런 게 경기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슬리는 건 사실입니다."

털이 짧아도 문제다. 유럽 선수들은 대체로 털이 많은 편인데 강하게 보이려고 삭발하는 일이 더러 있다. 그 쇠솔 같은 까칠까칠한 머리로 들소처럼 밀고 들어오면 참 난감하다. 손바닥 정도면 또 모를까 자극에 민감한 부위에 닿기라도 하면 견디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수염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상대의 집중력을 흩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야비한 짓을 하는 선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털은 냄새에 비하면 양반이다. 한국 사람들에게서 마늘 냄새 나듯 다른 인종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도 통칭 '노린내'라고 하는 이런저런 냄새가 난다. 노린내 정도면 다행이지만, 암내 심한 선수와 마주 서면 앞이 캄캄하다. 거의 죽음이다. 2~3m 앞에만 서 있어도 두통이 생길 지경이니 붙들고 씨름할 생각하면 기운이 다 빠진다.

국제대회 참가차 러시아에 갔을 때 얘기다. 러시아 선수와의 경기를 위해 매트에 오르면서 이미 암담한 미래를 감지했다. 5m 전방에서 가공할 위력의 암내를 풍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아이쿠야 싶더라고요. 어떻게든 빨리 끝내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들어 잡아 굴리고, 들어서 내리찍고 그랬죠. 1분30초 만에 테크니컬 폴로 꺾고 도망치듯 매트를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축하해 줘야 할 선후배들이 '저리 가라'고 소리지르더니 다 도망가는 거예요. 그 길로 샤워장에 가 찬물로 씻고 나왔죠. 당시 바깥은 영하 30도였어요." 그렇다고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칫 인종차별 운운하며 엉뚱한 데서 시비하자고 들면 그거야말로 진짜 난처한 일이기에.

#4. 강용균과의 추억

북한의 강용균과 참 친했다.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같은 체급의 네 살 아래 동생이었는데 국제대회 때 만나면 늘 사과부터 했다. 그가 그랬다. "형 때문에 만날 메달 따 갖고 가도 욕먹는다"고. 북한에선 한국 선수에게 지는 걸 무척 싫어했다. 강용균의 기량도 세계 정상급인데 심권호의 벽을 넘지 못하니 여간 답답할 노릇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심권호는 철벽이었다. 무려 6년간 열 번을 붙어 다 졌다. 그러니 강용균이 심권호에게 투덜거릴만도 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준결승에서 만났다. 결론은 심권호의 압승. 다행히 강용균이 동메달을 따면서 시상식 때 남북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가는 감동도 연출했다.

강용균과는 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제대회에 나가면 말 통하는 이가 둘밖에 없으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붙들고 몸을 풀었고, 몸으로 부딪치다 보니 정이 절로 생긴 것이다. 강용균이 심권호에게 여동생 소개해 달라고 농반진반 떼를 쓸 정도로 친분이 각별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거꾸로 심권호가 요구했다. 여자친구 소개해 달라고. 그러면서 '쭉쭉빵빵'을 원한다고 했더니 강용균이 대뜸 북한 미녀응원단을 가리켰다. "이번에 많이 내려왔다"면서. 우스개도 곧잘 통했다. "국제대회 때마다 만났죠. 가볍게 한 잔씩 나누기도 하고, 서로 방에 찾아가 놀기도 했죠. 동생이라고 용돈 몇 푼 주면 고맙다고 뱀술을 선물로 주고 그랬어요. 그런 관계는 은퇴 후에도 계속됐고요. 김일성 배지도 여러 개 얻었어요. 배지 수집하는 이들이 좀처럼 구할 수 없는 귀한 거라며 꼭 좀 구해 달라고 해서 용균이한테 빼앗아 갖다 줬죠. 한 대여섯 개 되는데 정작 저한테는 한 개도 없어요."

#5. 방송은 내 체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레슬링 해설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이가 어려 되겠느냐며 일단 사양했다. 갓 서른이었다. 방송사의 설득에 고민하다가 "한 번 하고 잘리자"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냥 시청자들로 하여금 레슬링을 이해할 수 있게만 하자는 생각이었다. 해설을 해 본 적도 없지만, 가르쳐주는 이도 없어 그냥 내 방식대로 하자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해설위원 일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꾸미지 않고 있는 대로 얘기한 게 제대로 먹혔다. 인터넷에서 난리였다. 재밌다, 순수하다, 솔직하다, 말 잘한다.... 온통 칭찬 일색이었다. 인터넷 인기 검색어 순위에서도 금메달 딴 선수보다 늘 위에 있었을 정도다. 그 바람에 각종 오락프로에서 출연 제의가 쇄도했고, 수시로 얼굴을 비추면서 연예인 뺨치는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세상사 오르막 다음엔 내리막 아니던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변함없이 마이크를 잡았건만 이번엔 지나치게 솔직하고 순수한 게 탈이었다. 심판의 편파 판정에 선수보다 더 흥분했고,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격하게 쏟아냈다. 그 와중에 거침없이 튀어나간 말이 바로 "에이~ 씨"다. 이른바 '막말 파문'이 인 것이다. 이번에도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고 검색어 순위도 1위였지만, 내용은 정반대로 비판 일색이었다. 정말 배가 터질 만큼 욕먹었다.

"그러고도 방송에 여러 번 나갔어요. 욕먹어도 나가야죠. 그런데 지난 동계올림픽 때 '제갈성렬 막말 소동'이 있었잖습니까. 거기서 왜 또 제 이름이 나옵니까. 이미 욕먹을 만큼 먹었는데 말입니다.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번 실수로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덩달아 욕먹으니 말이에요."

얼마 전 강호동이 진행하는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했다. 이번엔 절대로 욕먹지 않을 가슴 따뜻한 장면을 만들고 왔다. 팔다리 없는 미국 레슬링 선수가 스타킹에 나오면서 "심권호와 붙어 보고 싶다"고 해 기껍게 나가 2분짜리 3라운드를 뛰었다. "양팔은 반도 안 남았고, 다리도 없는데 레슬링 실력은 장난 아니게 좋더라고요. 적당히 맞춰 줘가면서 게임을 했지만 사람의 정신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낀 흐뭇한 시간이었습니다. 녹화 끝나고 밥 먹으면서 약속했어요.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그리고 뭐든 돕겠다고요." 심권호의 이벤트 레슬링은 6월 첫째 주 토요일에 방영될 예정이다.

◆ 이런 일, 저런 일

1. 심권호의 직업은?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코치 시절, 훈련을 위해 선수들 데리고 한국체대로 향했다. 체육관에 들어서니 동네 꼬맹이들이 부모와 함께 놀러 와 김밥을 먹고 있었다. 운동해야 하니 자리 좀 비켜 주십사 양해를 구하고 돌아서는데 몇몇 꼬맹이가 "야, 심권호다" 하고 아는 체했다. 방송 오락프로의 힘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다. 올림픽 금메달만으로는 꼬맹이들이 기억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흐뭇한 마음으로 선수들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 꼬마가 친구들에게 속삭이듯 묻는 소리가 들렸다. "심권호가 누군데?" 그러자 곁에 있던 꼬마가 스스럼없이 답했다. "심권호 몰라? 개그맨~."

2. 산과의 영원한 이별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것 중 하나가 산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산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런 천혜의 환경이 운동선수들에겐 죽음의 조건에 다름아니다. 놀러 가는 산이야 아름다운 무릉도원이지만, 운동으로 오르는 산은 땀과 고통과 눈물만이 존재하는 지옥이다. "문원중학교 뒷산이 남한산성이에요. 걸어서 올라도 숨찬 데를 정말 지긋지긋하게 뛰었습니다. 대표선수가 되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는 또 그 뒷산인 불암산을 달렸죠. 모르긴 해도 불암산은 한 1000번 정도 올랐을 겁니다. 토요일 외박 나가기 전에 모든 선수가 불암산을 뛰어야 했어요. 그런데 레슬링 선수들은 주중에 한 번 더 뛰었어요. 거의 주 2회 오른 거죠. 정말 게거품 물고 뛰었습니다. 아주 죽다 살았죠. 오르기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늦으면 언덕 인터벌 트레이닝으로 또 한 번 죽어야 해요." '쫄쫄이' 벗으면서 산과도 이별했다. 아무리 갈 데 없어도 산에는 안 가리라 다짐했다. 안 그래도 산에 가자는 친구 있으면 한 대 때려 주리라 맘먹고 있다.

3. 달아난 술집 종업원

한번은 술집 앞을 지나가는데 종업원이 손님을 끌기 위해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라 대수롭잖게 여기며 명함을 받아들고 무심결에 웨이터를 쳐다봤다. 한데 눈이 마주치자 그 종업원이 꽁무니 빠져라 줄행랑치는 게 아닌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벙벙했지만, 잠시 후 명함 보고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 명함에 술집 이름과 함께 '과장 심권호'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당시 한국토지주택공사 과장 시절이었거든요. 스포츠단에서 레슬링 코치를 맡고 있었는데 직급이 과장이었어요. 술집 이름만 빼면 영락없는 제 명함이었죠. 그 사람도 저와 그렇게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다고 도망은 왜 갑니까. 근데 제 이름도 술집에서는 조금 먹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