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후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3번 출구를 나서자 '金達來冷面(진달래냉면)' '拘肉館(구육관)' '歡迎光臨(환영광림·'어서 오세요'라는 뜻)'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한자 간판이 가득한 구로구 가리봉동 거리는 중국산 향신료 냄새와 중국어 및 한국어가 뒤섞인 이야기 소리로 가득했다.
가리봉동은 2009년 말 기준으로 서울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동(洞)이다. 0.43㎢ 면적에 7638명이 외국인이다. 2000년 이후 구로공단이 사라지면서 이곳은 조선족, 막노동꾼 등이 싼 월세방을 얻어 사는 허름한 곳으로 변했다. 하지만 내년 하반기부터는 이 풍경도 사라진다. 쪽방촌(벌집촌)이 몰려 있는 가리봉동 일대가 내년 하반기부터 2015년까지 재개발되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가리봉동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들이 나섰다. 금천예술공장 입주작가인 이수영(44)씨는 "직접 시민과 함께 가리봉동을 거닐며 몸으로 기억하기 위해 '가리봉 동네 한 바퀴'라는 예술 프로젝트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들과 함께 가리봉동 거리를 거닐었다.
◆사라지는 가리봉동 기억하기
남구로역 3번 출구에서 50m 정도 뻗은 가리봉동 거리에는 복래반점, 진달래냉면, 중경노래방 등의 가게가 줄지어 있지만 대체로 한적했다. 이씨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가리봉동은 생기가 넘치던 곳이었다"며 "가리봉동이 재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조선족들도 다른 곳으로 떠나 지금은 동네 전체가 가라앉은 상태"라고 말했다.
삼거리로 내려오는 길에는 개고기 샤부샤부, 소배필(소삼겹살) 같은 조선족 음식을 파는 가게가 이어졌다. 삼거리 왼쪽에는 중국동포타운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삼거리를 지나 직진하면 '연변거리'로 불리는 가리봉동 골목이 나온다. 골목을 따라 가게 50여 점포가 모여 있다. '전화방'이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 바깥에는 빨간 공중전화기 3대가 놓여 있고 벽에는 '연길특가'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식당에서는 배골돈두각(돼지갈비볶음), 궈바로우(찹쌀 탕수육), 초두부, 꽈배기 모양의 마화, 언감자밴새(언 감자로 만든 만두), 썩장(청국장) 등을 팔았다. 이씨는 "언감자밴새는 얼어서 먹지 못하는 감자를 이용해 만두피를 만든 것으로 이곳에서 파는 음식들은 거듭된 이주 속에서 태어난 '가리봉동산(産) 음식들'"이라며 "백년 전 국경을 넘어 먼 북쪽으로 떠났다가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이주한 조선족의 김치와 고사리나물은 이제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금단초두부 건너편에는 '가리봉시장-중국동포타운'이라는 아치형 간판이 있다. 시장에는 두께가 1㎜인 간두부와 우리가 아는 갓김치와는 다른 영채김치, 오리알, 식용잿물(소다) 등이 팔려나갔다. 조선족이 많이 먹는 옥수수국수와 주먹 두 개 크기의 만두도 있었다. 이씨는 "옛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가리봉시장을 거쳐 쪽방촌 집으로 향했을 것"이라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을 걱정했던 이들의 애환이 담겼던 장소"라고 말했다.
◆조선족 삶의 흔적 남아 있는 벌집촌
시장을 벗어나자 이씨와 함께 작업하는 작가 리금홍(39)씨가 "이제 우리 쪽방으로 가자"고 말했다. 이수영·리금홍 작가는 가리봉동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보증금 없이 월세 23만원에 약 5㎡(1.5평) 쪽방을 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2층 양옥집이었지만 내부는 작은 방 30여개로 나뉘어 있다. 집 한 채를 쪼개 생활하다보니 벌집과 비슷해져서 벌집촌으로도 부른단다. 이들 작가가 구한 방은 조그마한 구멍가게 옆 골목으로 들어가 한 명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약 60도 각도의 좁은 계단을 통해야 다가갈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니 다닥다닥 붙은 나무문 10개가 눈에 들어왔다.
맨 안쪽 208호가 작가들의 방이다. 방문 옆에는 수도꼭지가 있고, 조그마한 다락도 있었다. 5명이 둘러앉으니 방이 가득 찼다. 이수영씨는 "이 방을 구할 때 각서를 썼는데, 월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월세를 못 냈을 때 쫓겨난다'는 각서를 작성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리봉동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두 작가가 마련한 '가리봉 동네 한바퀴'는 조선족 음식을 먹으면서 마무리된다. 이날은 쉘벨과 감자밴새를 먹었다. 쉘벨은 안에 부추와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일종의 빈대떡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것과 비슷한 맛이지만 좀 더 기름지고 밍밍하다. 흰색 감자밴새는 송편 비슷한 맛이었고, 푸르스름한 밴새는 감자떡 같았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조모(54·주부)씨는 "가리봉동을 돌아보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중간 과정의 삶을 사는 조선족들의 삶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오는 8일까지 진행되며 참가 신청은 이수영 작가의 이메일(newbus11@hanmail.net)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