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김용환씨, 오원철씨.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少將) 박정희는 '혁명공약'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하겠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청와대 1·2 경제수석을 지낸 김용환(78) 전 재무부장관과 오원철(82) 전 경제2수석은 "5·16은 한국식 산업혁명의 출발이었고 10여년 만에 민생고 해결 '혁명공약'을 완수했다"고 했다.

오원철 전 수석이 기억하는 5·16 이전의 한국 경제는 빈곤 자체였다. 그는 5·16 직후 상공부에 들어와 1971∼79년 경제2수석으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정책을 담당한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 테크노크라트다. 그는 "5·16 공약으로 경제 재건을 내걸었지만 사실 당시 우리 경제는 재건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거지경제'였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초기 구상은 다른 3세계 국가들이 걸어간 '민족경제론'적 성격을 띠었지만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1962∼1967년) 계획의 골자는 원조자금이 줄어든 만큼 수입물량을 줄이고 대신 국내 생산으로 이를 충당하는 수입대체산업 육성이었는데 국내 산업기반이 전무(全無)해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박 대통령의 고민은 61년 7월 경제기획원 창설 이후 3년간 장관이 7번이나 바뀐 데서도 알 수 있다.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전~대구 구간의 마지막 준공 테이프를 끊고 첫 시험주행을 하고 있다.

정부는 결국 수입대체형 '민족경제론'을 버리고 1963년 말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63년부터 재무부 이재(理財)과장·국장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용환 전 장관은 "가진 게 없는 우리에게 대안은 노동력에 기반을 둔 수출주도형 경공업개발 전략뿐이었다"고 했다. 오 전 수석은 이 대목에서 "여공(女工)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의용군이었다"고 회고했다. 낮은 기술 수준을 가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산업은 섬유·운동화·가발 제조와 전자제품 조립 정도였고 이는 여공들의 몫이었다. 오 전 수석은 "정부는 64년 원화가치를 2배 절하시킴으로써 사실상 여공들의 국제 노임을 반으로 깎았다"고 했다.

이런 전략은 1964년 11월 30일 1억달러 수출을 이룩하면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64년 말엔 1억2000만달러를 수출해 43.2%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해마다 40∼50%의 수출 성장세를 이어간 우리 경제는 1968년엔 3억5859만달러를 수출, 1960년(3283만달러)의 10배를 넘어섰다.

우리 경제는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에 나섰다. 여기에는 '경공업→중공업'으로의 산업고도화 전략뿐 아니라 안보 문제가 깔려 있었다. 닉슨 미 대통령이 1970년 2월 '아시아인의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오 전 수석은 "전략물자로 전환되기 쉬운 중화학공업을 육성해놓으면 미국이 한국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할 것이란 게 박 대통령의 판단이었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최근 원전(原電) 수출이 빛을 본 것도 당시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으로 기틀을 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