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MVP, 83~87년 골든글러브 수상, 83~85년 홈런왕 및 타점왕, 84년 트리플크라운(홈런-타격-타점), 87년
타점왕, 2002년 KBO 프로야구 20년 통산 포지션별 스타 포수 부문 선정.... 가히 눈부신 이력이다. 통산 1449경기 출전에
4310타수 1276안타, 252홈런, 861타점, 평균 타율 0.296. 수치만으로도 대단한 활약상이 피부로 확 느껴진다. 그러나
진짜 값어치 있는 진기록은 따로 있다. 1982년 3월 7일 MBC와의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서 기록한 1호 홈런과 안타, 타점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야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인구에 회자될 불멸의 기록이다. 물론 엄청난 노력과 희생으로 얻은 결과다.
수없이 날아드는 팬레터를 단 한 통도 전달하지 않고 모두 태워버린 아버지의 광적인 단호함도 톡톡히 한몫했으리라.



 










펑고배트로 정동진 감독 엉덩이 '34대 매질'
선수들 훈련 게으름 피자 "잘못 가르쳤다…나를
때려라"

정감독 꽁꽁 언땅에 30분간 엎드려 있어 도우려 구타?
 


#1. 별 보며 다짐하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라 철원서 나고 대구서 자랐다.



대구로 내려온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그야말로 야구의 '야' 자도 모르던 시절이다. 게다가 대구 중앙초등학교에는 운동부도 없었다. 취미로
유도를 했으며, 또래들과 고무공을 손으로 치며 야구 흉내를 내는 '야구사이'라는 놀이를 즐겼다. 야구를 접한 건 대구중학교에 입학하면서다.
체육부장 선생님이 "야구 하고 싶은 놈들 운동장으로 다 나오라"고 했다. 오후 수업을 빼주는 조건이었으니 안 나가면 바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5교시에 1학년 600명 거의 전원이 운동장에 모였고, 곧바로 테스트가 시작됐다. 우선 1000m 달리기로 절반 이상 추렸고, 100m, 50m,
30m 순으로 달리기를 되풀이하며 주력 달리는 친구들을 솎아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니 30명이 남았다. 그리고 볼 주고받기를 통해 최종
20명을 선발했다. 운동회 때마다 공책을 독식하는 준족인 데다 운 좋게도 볼 캐치 또한 매끄럽게 잘 됐다.



그게 다는 아니었다. 부모님 허락이라는 보다 까다로운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집에 가서 얘기를 꺼냈더니 아버지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할 자신 있냐"고 물었다. 다부지게 어금니 물어 보이고 야구를 시작했다. 새내기들은 유니폼이 없어 일반 운동복 차림으로 뛰어다녔다. 주된
임무 또한 물 떠다 나르고, 땅 고르고, 잔돌 줍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리 지르기가 가장 힘들었다. 운동부의 생명은 파이팅이라며
시종 소리를 지르게 했다. 마침 변성기라 나중엔 목소리가 얄궂게 변하기까지 했다.



하루는 3학년 선배가 집합을 걸었다. 군기 타임이었다. 2학년 선배들이 매타작당하는 모습을 보며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데 3학년 선배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넌 뭐야." "신입생인데요." "신입생은 야구선수 아냐? 나와." 10대를 맞고 나니 엉덩이가 터졌다. 2학년 선배들은
두툼한 슬라이딩 팬티라도 입었지만, 신입생들은 삼각팬티 위에 홑겹 운동복 아니던가. 사정없이 패대니 엉덩이가 배겨날 리 만무했다. "숙소에서
한 200m 정도 떨어진 교문까지 걸어 나오는데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옛날에는 공해가 없어 별도 유난히 반짝거렸잖아요." 때는 이미 늦었다. 부모님께 약속한 터라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운동장을 가르지르며 맹세했다. "분하고 원통해서 10년 후에는 반드시 대한민국 최고 선수가 되겠다"고. 버스 타고 집으로 가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밤 12시까지 연습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자.' 4시간 이상은 절대 안 자겠다고 자신과 단단히 약속했다. 무릎 꿇고 밥 먹는
아들을 이상히 여기는 부모님께 '하체 훈련'이라고 둘러댄 후 "새벽 4시에 깨워서 안 일어나면 따귀라도 때리라"고 어머니께 신신당부했다. 못내
미심쩍어 자는 아들 잠옷을 벗겨 본 어머니는 기절했고, 아버지는 "나쁜 놈들 가만 안 두겠다"며 흥분했다. "거기서 제가 사정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면 더는 야구를 할 수 없다면서요. 그리고 재차 대한민국 최고를 다짐했죠."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라면 한 개 끓여
먹고 앞산 밑 충혼탑까지 뛰었다. 왕복 2시간 코스였다. 어떤 날은 선배 집에 찾아가 대문 두들기며 야구 가르쳐 달라고 생떼를 쓰기도 했다.
그 새벽에. 물론 돌아온 건 '미친놈'이라는 핀잔과 군밤뿐이었지만. 이때 시작한 새벽 뛰기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계속했다. 비가 오면 스윙연습으로
대체했다. 사춘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미팅, 제과점, 그런 게 부러웠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포기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겨울 달리기는 너무 힘들었어요. 손발 트는 거야 예사지만, 거시기가 얼어 아파서 못 뛰겠더라고요."



#2. 스승을 때린 제자



대구상고 1학년 때인 1975년 대통령배 출전을 위해 서울 갔다가 두 번 놀랐다.



'대한민국 포수의 전설' 정동진 감독 때문이다. 고교 선배이기도 한 정 감독은 특히 포수 입장에서는 각별한 영웅이었다. 은퇴 후 제일은행
지점장으로 있던 그를 운동장에서 만난 것이다. 첫 대면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늘 동경하던 분이라 얼굴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데 정말 심장 터질 일은 곧이어 벌어졌다. 정 감독이 부르더니 글러브를 내미는 게 아닌가. 그것도 현역 때 직접 쓰던 글러브를.
"훌륭한 선수가 돼라"는 따뜻한 당부와 함께. 그해 말에는 더욱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포수의 전설'이 대구상고 감독으로 부임한 것이다.
'물 만난 고기'가 된 기분이 들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미 안면도 튼 사이고, 격려까지 받는 마당인 데다 포수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서였다. 하늘 같은 분이라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리라 다짐까지 했을 정도다.



정 감독이 짠 러닝훈련 코스는 대구상고에서 앞산 충혼탑까지 뛰어갔다 오는 거였다. 대략 1시간20분 정도 걸렸다. 한번은 말썽꾸러기 주장이
잔꾀를 부렸다. 골목으로 빠져 놀다가 돌아가자는 제안이었다. 인기 있는 고교야구의 전국 최강 팀 주장이라고 신임 감독을 깔본 것이다. 다들
불안한 마음이 없잖았으나 혹하는 마음에, 그리고 주장의 말에 반기를 들 수 없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뒤를 따랐다. 인근 주택가 골목을 누비며
장난치고, 노래 부르고.... 한참 신바람을 내다가 시간 맞춰 학교로 향했고, 1㎞를 남기고 전력 질주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할딱이는
거친 숨소리를 감독에게 보여줬다.



정 감독은 조용히 한마디 했다. "한 번 더 갔다 와." 다들 소스라치게 놀라 득달같이 충혼탑을 돌고 왔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5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선수들이 골목에서 빈둥대는 걸 택시운전사가 보고 학교에 전화해 항의하자, 정 감독이 택시 타고 가 현장을 확인한 후 내린 조치였다.
정 감독은 점퍼를 벗고 헉헉대는 선수들 앞에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친 탓이다. 그러니
서른네 명이 돌아가며 나를 때려라." 뜻밖의 상황에 놀란 선수들이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 감독은 차분했다. "아니다. 내 불찰이다. 때려라."
그렇게 30분을 실랑이질했다. 꽁꽁 얼어붙은 차가운 땅에 30분이나 손바닥을 대고 있는 정 감독은 맞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차라리
맞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존경하는 감독님께서 더는 엎드려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옆에 있던 펑고배트를 집어들었더니 선배들이 '너 왜 그러느냐'며
기겁하데요. 그래 안 하면 감독님을 도와드릴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감독님이 반색하시며 '그래 만수야 네가 나를 좀 도와다오' 하시데요. 그래서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했죠." 우선 열 대를 때렸다. 얼마나 아팠으면 제자의 매질에 움찔움찔 놀라며 몸을 비틀었다. "아직 스물네 방 남았다."
감독은 매질하는 제자보다 더 독종이었다. 결국, 서른네 대를 다 때렸고, 감독의 다리는 만신창이가 됐다. 오금부터 엉덩이까지 다 터졌다. 선수들이
감독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정 감독은 딱 한마디로 사태를 매듭지었다. "됐다. 내일부터 열심히 하자."



한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삽시간에 소문이 번지면서 사람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찔렀다. "어느 망종이 스승을 다 패느냐"며. 부모님도
"너는 내 자식 아니다"며 매몰차게 외면했다. 그리고는 감독을 찾아가 "당신이 우리 아들 죽였다"며 항의했다. 심지어 야구 선배들이 죽여버리겠다며
대구로 내려오기까지 했다. 황급히 서울 이모집으로 달아났다가 누나에게 설득당해 열흘 만에 낙향했다. 정 감독은 "저놈 최고의 선수가 될 거다.
최고로 키울 자신 있다"며 되레 기뻐했다. 전국 최고의 야구선수들을 잡는 방법은 희생밖에 없다고 여겨 일부러 판을 벌인 것이다. "며칠 후
사모님께서 학교에 찾아와 제 손을 잡고 우시더라고요. '괜찮다 만수야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해라' 하시면서요. 그러더니 조용히 그러시데요.
'때려도 어쩌면 그렇게 세게 때렸냐'고. 사실 그때 저는 이성을 잃었거든요."



#3. 운동, 또 운동




알게 모르게 운동 참 많이 했다. 밤마다 집앞 전봇대 밑에서 가로등을 벗 삼아 맹렬히 스윙 연습을 했다. 이따금 '찹싸~알떡' 소리가 구성지게
귓전을 때리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배팅 장갑도 없어 맨손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면 금세 군데군데 물집이 잡혔고, 그게 터져서 피가 났다.
그리고 갈라졌다. 겨울엔 손바닥이 딱딱해지고 굳은살이 벌어지면서 뼈까지 보였다. 그러니 통증은 오죽했을까. 벌어지고 갈라진 손에 자전거 튜브를
감으면 스윙할 때 통증도 줄고 한결 수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피 때문에 튜브가 미끈거려 스윙에 힘을 실을 수가 없게 된다. 병원에
갈 생각은 않고 그저 소독약과 '빨간약'만 뿌려댔다.



학교 훈련 끝나면 남아서 밤늦도록 타이어를 쳤다. 나무받침대 위에 고정해둔 버스 타이어였다. 그 좋은 힘에 탱탱한 타이어들 사정없이 두들겨대니
소리가 클 수밖에. 그러면 담장 너머 가정집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야, 잠 좀 자자. 저거 누구고. 이만수 아이가. 햐~, 저놈 저거
못 말린다카이."



당시에는 근육 운동을 못하게 했다. 배트 둔해지고 던지는 데도 문제 생긴다고. 그래서 아령도 못 들게 했다. 물론 듣지 않았다. 아령을 쥐고
살았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는 거포로의 성장에 보탬이 된 고집이었다. "그때는 상체가 역삼각형에 배에는 왕자가 뚜렷해
보기 좋았죠. 지금은 아이들이 놀려요. '아빠 옆구리에 살이 많아 잘하면 날아가겠다'면서요." 한양대 시절에는 학교에서 남산 꼭대기까지 뛰었다.
끝도 없는 그 오르막은 뛸 때마다 사람의 진을 쪽 빼놨다. 도착해서는 아령과 바벨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고, 돌아올 때는 지친 데다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탔다. 한 가지 중요한 건 무슨 운동을 하든 중1 때 스스로 정한 새벽 4시 기상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4. 독서광이 된 사연



중학교 때 한 해 구르는 바람에 1년 아래 남동생과 대학을 같이 다녔다. 성균관대에 다니던 동생은 집으로 여자친구를 곧잘 데려왔다. 그때마다
여자친구의 친구도 함께 오곤 했다. 그 친구에게 서서히 마음이 가더니 짝사랑으로 번졌다. 어머니도 벌써 그 친구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저 아가씨 같은 여자 만나면 무조건 결혼시켜 주겠다"고 공언까지 했을 정도다.



동생에게 술 사주고, 밥 사주며 비위를 맞춘 끝에 한양대 앞 '파리다방'에 마주앉게 됐다. 그때까지 커피라고는 마셔본 적이 없어 친구들이
"따라만 하라"고 코치까지 해줬다. 처음부터 예상문제가 들어맞았다. 커피를 시켰고, 부랴부랴 따라 시켰다. 크림 한 스푼에 설탕 한 스푼.
똑같이 넣었다. 한데 느낌조차 따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처음 맛보는 커피는 너무 썼다. 사약도 그런 사약이 없었다. 참다 참다 크림과 설탕을
다섯 스푼씩 더 퍼넣었다. 그랬더니 커피가 죽처럼 뻑뻑해지는 게 아닌가. 마주앉은 여성의 인상이 싹 바뀌었다. '이런 촌놈' 하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다음 날 다시 만나 캠퍼스를 돌았다. '이 여자 내 여자다. 손대면 죽어'라고 속으로 외치며. 그날이 78년 10월
20일이었다. 캠퍼스를 다 돌고 다시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이실직고하고 계란 반숙을 시켰더니 또 표정이 싸늘해졌다.
세 번째 만난 날은 고민 끝에 요구르트를 시켰더니 이번에도.... 결국, 한 달 만에 "그만 만나자"는 비보가 전해졌다. 여자 앞에선 사시나무가
되고, 이야기라고는 '예' 대답이 전부이니 어느 여자인들 마주하고 싶을까. 방법을 물었더니 '다음부터 리드해라', '얘기 좀 해라' 두 가지
과제를 던졌다.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나친 정독 스타일이라 열흘이 가도록 250페이지짜리 한 권을 못 읽어냈다. 간신히 한 권 읽고 만나
스토리를 얘기했더니 15분 만에 바닥났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했다. 그렇게 그 까다로운 여성은 조금씩 이만수의 여자가 되어
갔다. 여자 때문에 시작한 독서는 인생의 큰 재미로 자리 잡았다. 요즘은 연간 100권 이상 읽는다. 가히 독서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학 때 학교신문 편집장을 지낸 아내는 애당초 독서광이었다. 부부가 독서광이니 집에는 온통 책밖에 없다. 경기를 위해 지방으로 이동할 때 버스
안에서 책보는 맛도 그만이다. 동계 캠프를 떠나면 책만 20여권 챙긴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던 해에는 총 23권 중 오바마 관련
서적만 8권 갖고 떠나 다 읽고 돌아왔다.















이런 일,
저런 일
중3때 포수인 내가 마운드 올라 문교부장관배
우승…투수상 받아

 ① 쌍코피, 번트귀신, 독종



 중학교 때 별명이 '쌍코피'였다. 대한민국 최고가 되리라 다짐한 뒤 하루 4시간 자고 죽자사자 운동을 해대니 툭하면 코피가 쏟아졌던
것이다. 앉으면 잠들었고, 버스 타면 늘 종점이었다. 운전사 아저씨가 깨워야만 일어났다. 늘 학교에서 집에 가는 거리보다 종점에서
돌아오는 길이 더 멀었다. 또 다른 별명은 '번트 귀신'. 2년이나 그렇게 용을 썼는데도 도통 실력이 늘지 않아 2학년을 두 번
다녔다. 만날 '우익수에 2번 타자'였다. 1번 타자 출루하면 곧바로 번트 대는 게 주된 임무였다. 하도 번트 연습을 하고 실전에서도
번트만 하다 보니 눈 감고도 성공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붙은 달갑잖은 별명이다. 그나마 한 가지 자랑스러운 별명이 있다면 '독종'이다.
오기와 끈기, 깡다구로 하는 건 뭐든 1등이었다. "양팔 수평으로 벌린 채 물 절반 채운 양동이를 들고 버티는 운동을 했어요. 어깨
힘 기른다고. 다들 1~2분에 포기했지만, 저는 항상 5분을 버텼죠. 그게 어깨에 얼마나 해로운지도 모르고 당시에는 좋다고 그렇게
했어요. 철봉 매달리기를 해도 1등이었죠. 한 번 매달리면 안 내려왔거든요."



 ② 투수상 받은 포수




 중3 때 포수로 자리 잡았다. 덩치 좋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대구중 에이스는 김만복이었다. 만복이와 만수가 배터리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당시 허청길 감독은 경기 중 김만복이 많이 두들겨맞으면 다른 투수를 내지 않고 포수와 역할을 맞바꾸게 했다. 동네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풍경이었지만, 허 감독은 곧잘 그렇게 했다. "마운드가 흔들리면 어깨 좋다고 저보고 던지라고 했어요. 세긴
셌던가 봐요. 직구만 던져도 못 치더라고요. 당시 최고의 전국대회인 문교부장관배에 나가 우리 대구중이 우승했는데 포수인 제가 투수상을
받았습니다. 물이 올라 세 경기 연속으로 던졌죠. 훗날 사람들에게 투수상 받았다고 하니 아무도 안 믿어주더라고요." 끝없이 마운드와
안방을 오르내리던 어느 날 감독에게 애걸했다. 제발 투수는 시키지 말아 달라고. 남들은 투수 못해 안달인데 말이다. 대구상고 올라가면서
포수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③ 선배가 된 친구




 김시진과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58년 개띠 동갑이다. 대구중앙초, 포항중앙초로 학교는 달랐지만 매년 1회 포항에서 벌어지는
경북도대회에 나가고, 더러 포항으로 훈련도 가면서 자꾸 만나다 보니 친구가 됐다. 그런데 대구상고에 들어갔더니 김시진이 있는 게
아닌가. 앞뒤 잴 틈도 없이 소리부터 질렀다. "야, 시진아 반갑다." 잠시 후 3학년 선배가 집합을 시켰다. "김시진이 네 친구야?
너 몇 학년이야? 선배한테 말을 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트로 엉덩이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선배들에게 차례로 한 대씩 다 맞았다.
속칭 '돌림빵'이었다. "당시 맷집은 최고였죠. '그래, 때려라' 하고 엉덩이 대고 있었어요. 그래도 매에 장사 있나요. 서른 대
맞고 쭉 뻗었죠. 다음 날부터 김시진을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하고 90도로 절을 했죠. 고교 2년, 대학 3년 꼬박 5년을 가방
들고 따라다녔습니다. 중학교 4년 다닌 죄 하나로요. 김시진이 졸업할 때 '이제 말 놓자'고 하더라고요. 5년 만에 처음으로 긴장
풀고 말했죠. '그래, 이 자슥아 너 인간이 그러면 안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