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적기단 건물지

와축기단(瓦築基壇), 즉 기와를 쌓아 만든 건물 기단은 그 동안 백제의 전형적인 기단 축조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신라도 600년대 초반 이런 방식을 사용해 건물을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소재구)는 신라시대 절터로서 인용사(仁容寺)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 알려진 전(傳) 인용사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7세기 초엽 경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와축기단 건물지를 발굴했다”고 26일 밝혔다.

와축기단 건물지는 사비 도읍기 백제(538~660년)에서만 보인다고 알려져 있었다.이번에 인용사 터에서 확인한 와축기단 건물지는 도리 3칸, 보 1칸(12.6×6.7m) 규모다.

연구소는 “기와를 이용해 기단을 구축하는 형식은 백제의 그것과 같지만 기와를 경사지게 엇갈려 쌓았다는 점에서 백제의 사례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며 “기단토 내부에서 수습된 고식의 단판연화문수막새, 단각고배 등의 출토유물과 건물지의 중복관계(사찰 건물의 아래층에서 확인)로 볼 때 7세기 초엽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인용사터 우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사초(史草)로 추정되는 내용을 기록한 목간 1점도 확인됐다. 목간은 긴 네모꼴인 세장방형으로 길이 15.8㎝, 너비 1.38㎝, 두께 0.77㎝이며 수종은 소나무인 것으로 드러났다.

목간의 앞뒤 양면에서 묵서가 약 40여자 확인되는데, 앞면은 길이방향으로 1행만 기재돼 있지만, 뒷면은 2행의 묵서가 서로 엇갈리게 기재돼 있다. 연구소는 “전형적인 왕희지체로 매우 능숙하게 쓰인 글씨체”라고 평가했다. 왕에게 대룡(大龍)이라는 사람이 소귀공(所貴公) 등 2인에 대한 인물평과 천거를 아뢰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이러한 형식과 내용으로 볼 때 이 목간은 어떤 사실을 기록한 자료로서 정식문서로 정리하기 전 단계의 기록, 즉 사초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목간에 보이는 대룡이라는 인물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원성왕(재위 785~798년)의 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이외에도 연못과 우물, 건물지 등에서 원반형 토제품과 동경(銅鏡), 토기, 복숭아씨 등 통일신라 제의 행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도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