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느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선생님이 조선시대 '사림의 대두'를 가르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두'가 뭐예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사림'(士林·조선 중기 신흥 집권세력)을 가르치려는데 학생들이 '대두'를 모르니 어떡하나? 선생님은 수업의 핵심은 뒤로 미루고 '대두'(擡頭·고개를 듦)의 뜻풀이를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본 고등학교라면 이런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은 1981년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한자 1945자를 '상용(常用)한자'로 지정했다. 초등학교 1006자, 중학교 939자씩 나눠 가르친다. 가르치는 순서도 짜임새가 있다. '사람 인(人)'은 초등 1학년, '새 신(新)'은 2학년, '나아갈 진(進)'은 3학년 때 가르치는 식이다. 그 덕에 고교 입학 전까지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단어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신문·잡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

▶우리도 1972년 '교육용 기초 한자 1800자'라는 걸 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니 허울만 좋고, 대개는 학원에서 배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교과서에 쓰인 문장 가운데 핵심 어휘는 90% 이상이 한자어다. 과학 책에서 '초식(草食) 동물', 수학 책에서 '예각(銳角)' '둔각(鈍角)' 같은 것을 배울 때 한자를 아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은 이해 속도나 받아들이는 감각에서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일본 문부성 문화심의회 국어분과위가 엊그제 종래의 상용한자에서 191자가 늘어난, 2136자의 '개정 상용한자'를 발표했다. 새로 포함된 한자에는 '우울할 울(鬱)' '오만할 오(傲)' 같은 어려운 글자가 여럿 들어있다. 국어분과위는 "컴퓨터 일상화로 사이버 공간에서 상용한자 범위를 넘어선 한자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져 상용한자를 확대하고 한자쓰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한글전용'이냐 '국한혼용'이냐 논쟁의 덫에 걸려 한자교육이 한발짝도 못 나가는데 일본은 컴퓨터 시대를 맞아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있다. 그 차이는 다음 세대 두 나라 국민의 어문 생활의 풍요로움과 지력(知力)의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 일본에선 컴퓨터 세대일수록 한자를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국에선 왜 그런 인식이 나오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