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30돌 릴레이 인터뷰]⑤'양심선언 계엄군' 이경남 목사

"젊은 날 씻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의 한 페이지입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목회 활동을 펼치며 조용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이경남 목사(54).

이 목사는 30년 전 오월, 낯선 땅 광주에 서 있었다. 당시 그의 신분은 얼룩무늬 군복의 진압군.

'제주도에 게릴라가 침투했다'는 말과 함께 밤새 달려 도착한 곳은 제주도가 아닌 광주 동구 서석동 조선대학교. 그는 "부대가 이동하는 곳이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며 30년 전 상황을 설명했다.

신학대학교에 다니던 그가 군복을 처음 입은 것은 정국이 어수선하던 1979년 5월. 10·26 이후에는 전쟁경계령인 데프콘Ⅲ까지 발령됐다.

이듬해 5월 특전사령부 제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일병으로 '오월의 문'에 들어선 그는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영향인지 격렬한 시위는 없었지만 오후 들어 시민들의 동참이 이어지면서 기어코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고 기억했다.

그가 속한 부대의 작전 지역은 전남여고와 옛 전남도청 일대. 그야말로 '항쟁의 중심지'였다.

하루 하루가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과도 같았고,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에 빠졌고 부상당한 시민을 피신시키다 상급자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당해야만 했다.

이후 '끝없이 이어지는 고뇌에 직면했었다'는 이 목사는 남구 송암동 인근에서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고 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이후 부대에 복귀하면서 10여 일에 이르는 젊은 날의 씻을 수 없는 기억의 한 페이지에서 깨어났다.

전역 뒤 대학을 마치고 강원도 횡성과 경기도 평택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이 목사는 당시 진압에 참여한 군인 가운데 유일하게 현장의 목소리를 기록해 지난 2000년 '전태일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 목사는 지난달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을 찾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기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는 "광주에서의 경험은 육체적으로는 큰 위기였지만 내면에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며 "5·18이 정당한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한 만큼 이제는 광주 이야기를 삼가고 싶다"고 말했다.

5·18 30주년 소회에 대해 이 목사는 "광주묘역(5·18민주묘지)에 묻히면 좋겠다. 물론 안 받아주겠지요"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