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일본 사람이세요?" "어떻게 한국 사람하고 똑같이 말을 해요! 전혀 외국인이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이런 말을 하루에도 서너 번씩 듣는다. 그럴 때면 나는 "한국 조상의 DNA가 섞여 있어 그런가 봐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몇 년째 한국에 계셨어요?"라는 질문이 재차 나온다." "15년 됐어요." 이런 대화를 하다 보면 한국 땅에 시집오게 해주신 하늘나라 외할아버지께 또 감사하게 된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앉혀놓고 "지금까지 말을 안 했지만, 네 외할아버지는 한국분이란다…"라고 하셨다. 나에게 한국 피가 섞였다니! 한국이라곤 단지 '서울'밖에 몰랐는데…. "옛날에 외할아버지는 신학문을 배우러 일본에 왔다가 외할머니(일본여성)를 만나셨어. 그러다 일본에 귀화했고 작은 인쇄공장을 하셨지."

그때 처음으로 우리 가족사(家族史)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외할아버지의 발음이 독특했었다. 사실 외가 쪽에선 한국말은 금물이었다. 어머니도 한국말을 모른다.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당시 한국사람에 대한 차별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어머니는 학교 가는 길에 누군가가 던진 돌을 맞아 운 적이 있었다 한다. 둘째 외삼촌은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혼당했다. 어머니가 이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도 뒤늦게 알려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에 입사하면서 나도 부모님처럼 사내 결혼해 평범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었다. 미국 배우 존 배리모어가 "행복은 때때로 열어놓은 줄 몰랐던 문으로 몰래 들어온다"라고 했던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어느 날 어머니의 소개로 한국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뿌리를 찾겠다는 의식이 강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외국에 보내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편을 한번 만나고는 마음이 확 바뀌셨다. 아버지는 일본 남자에게서 볼 수 없는 한국 남자의 남성다움에 매료되셨다. 그날 남편은 장인어른과 술자리를 하면서 한국의 '진짜 사나이'를 내세워 쉴 새 없이 잔을 비웠다. 아버지는 한국 '육군 병장' 출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셨다.

외할아버지가 일본인인 외할머니와 결혼하신 것과 반대로 나는 한국 남자를 만나서 한국에 시집오게 되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일러스트=이철원기자 burbuck@chosun.com

일본 요코하마의 도시처녀가 남편을 따라 밭에서 호미로 잡초 뽑고 거름도 주는 한국 천안의 농촌 아낙이 됐다. 비타민 C가 많아 면역증진제로 쓰는 한국 토종 손바닥선인장(일명 천년초)을 키운다. 일본에서 유기농 재배하듯이 우리도 농약이나 제초제를 일절 안 쓰며 생즙을 만들어 판다. 선인장 가시에 찔려 매번 아파하면서도 벌써 9년째 농사짓고 있다. 1000여평 농사일이 고되기도 하지만 판로가 없어 매번 헛 농사짓는가 싶어 손 놓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학원 다니다 중퇴한 남편도 한숨짓는 날이 늘고 있다. 그러나 오기가 생겨 다니는 곳마다 "에미(나의 일본 이름)네 천년초를 사세요"를 외치고 다니지만 별반 효과가 없다. 농사로 돈벌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래도 한국 사람은 친해지면 정이 담긴 선물부터 가족들의 애경사까지 챙겨준다. 한국 드라마가, 한류가 일본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도 이런 인간관계의 정과 사랑, 가족의 3박자가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큰아들 덕분에 작년엔 초등학교 학부모 회장이 됐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전교 회장에 뽑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학교 일만 열심히 따라다니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회장 '턱'을 내야 하고 학교 발전기금도 모아야 한다. 일본 공립학교에선 상상할 수 없는 '수금 사원' 노릇도 하면서 나도 억척스런 한국 학부모 노릇을 배워갔다.

얼마 전 중학생이 된 큰아들이 학교 국어 시간에 '가정 소개'를 했다. "우리 가정에는 숨기고 싶은 사실이 있어요. 그러나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니,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우리 엄마는 일본사람이에요…." 엄마가 일본 사람이라는 게 큰아들에겐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 아들 얘기를 듣고는 눈물이 떨어졌다.

우리 집은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아버지(남편)와 아이들 4명만 나온다. 어머니가 없다. 결혼 후 6개월간은 이중 국적이 되지만 6개월 안에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까지는 일본 국적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엄마 없는 가정을 만드는 한국법이 야속하기만 하다. 이중국적 문제 해결이 우리 같은 다문화 가정에는 시급하다. 아이들은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을 떼는 '동사무소 관할'이고, 나는 시청에 외국인등록을 해야 하는 '시청관할'이라고 얘기하면 누구나 재밌어 한다.

새벽과 밤엔 기업체와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일본어 강사로 뛰고 낮에는 부지런히 농사일한다. 15년간의 한국 생활은 이처럼 나에게 억척 학부모, 억척 주부 노릇을 가르쳐주었다. 외할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내 손녀, 한국 아줌마 다 됐네"라며 웃으실 것을 생각하면 절로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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