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18일, 대전월드컵경기장은 붉은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대~한민국"은 유난히 더 크게 울려퍼졌다. 상대가 빗장 수비의 대명사, 우승 후보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태극전사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온 신경을 이탈리아 선수들을 막는데 집중시켰다. 일부 선수는 후에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투지의 화신' 김태영(현 올림픽대표팀 코치)도 그랬다. 홍명보(현 올림픽대표팀 감독) 최진철(현 강원 코치)과 최강 스리백을 구축한 김태영은 복서 출신의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밀착 마크했다. 그러다 갑자기 전반 9분, 얼굴을 부여잡고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비에리가 휘두른 왼팔에 일격을 당한 것이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김태영은 라인 밖으로 실려나가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 중상이 우려됐다. 코피가 흘렀다. 다행히 김태영은 코를 매만지더니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비에리를 죽어라 뒤쫓았다. |
"의무팀 거짓말…코뼈 부러진 줄 몰라" |
검은 마스크 붉은색으로 바꿔…후배들은 안 다쳤으면 |
▶코뼈가 부러진 줄도 몰랐다
사실 김태영의 코뼈는 이때 골절됐다. 곧장 수술 받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의무팀과 히딩크 감독은 수비의 핵 중 하나인 김태영을 뺄 수 없었다. 그래서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괜찮다, 괜찮다"며.
김 코치는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의무팀은 '걱정말고 뛰어라'고 하더라. 그런데 코가 이상했다. 숨이 막혀 뛰는 게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비에리는 김태영의 마크를 뚫고 기어이 전반 19분 헤딩 선제골을 넣었다. 그래도 전반을 1실점으로 막은 것은 성공이었다. 후반전 대반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김태영은 하프타임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코를 만지작거리며 의무팀에 물었다. "코뼈가 부러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당황한 의무팀은 재차 "괜찮다. 정상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고 말하며 서둘러 등을 돌렸다.
김태영은 그렇게 후반 18분까지 뛰며 투혼을 발휘했고 8강 기적을 지켜봤다. 의무팀은 경기가 끝나고서야 김태영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인근 병원으로 급히 이송해 수술시켰다.
▶기왕이면 붉은색 마스크로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김태영이 필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태영을 출전시킬 방법을 강구했다. 순간 일본대표팀의 미야모토가 코뼈가 부러지자 배트맨처럼 마스크를 하고 경기에 출전한 게 떠올랐다. 일본 J-리그에서 뛰던 유상철에게 다급히 SOS를 쳤다. 천우신조인지 다음날 새벽 마스크 제작자인 일본인과 접촉해 일사천리로 마스크 두 개를 만들었다. 검은색으로 된 연습용과 경기용 두 개였다.
김태영은 마스크를 보더니 "붉은 색으로 해달라"며 투지를 불살랐다. 그래서 '마스크맨' 김태영이 탄생했다.
김태영은 이후에도 4강(독일), 3~4위전(터키)에 모두 뛰며 한국의 4강 기적을 일궜다.
김 코치는 "한 개를 다른 곳에 빌려줬다가 최근 돌려받아 두 개를 온전히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한축구협회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했다.
앞선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 수비수들은 꼭 한 명씩 다쳤다. 김 코치를 비롯해 1998년 이임생(홈 유나이티드 감독)과 2006년 최진철의 붕대 투혼이 있었다. 남아공월드컵에서 다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대비해야 한다.
김 코치에게 경기 중 다치면 어떤 각오나 자세로 경기를 뛰어야 하는지 물었다.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안 다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후배들이 남아공에서는 절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치지 않고 경기를 마치는 게 팀에 가장 헌신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