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완(51)은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디자이너다.
그의 옷은 꿈속을 걷는 듯 낭만적이고 화려하지만, 그 도를 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단아한 정장과 원피스, 색채가 풍성한 모피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둥글게 재단한 어깨선, 부드러운 리본과 러플, 광택 있는 소재를 적절히 활용한 옷이 많다.
"디자이너는 파도 위에서 중심을 잡는 사람과도 같다. 트렌드를 앞서가면서도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여성이건 남성이건 입었을 때 가장 섹시해 보일 수 있는 옷. 내가 추구하는 옷은 그런 옷이다." 손정완 디자이너의 말이다.
김태희·황정음·제시카(소녀시대)·윤은혜 같은 연예인이 열광하는 디자이너로도 유명하지만, 그가 만든 옷의 파워는 패션 피플의 입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대중이 그의 옷을 사들이는 구매력(購買力)에서 나온다.
대기업과 손을 잡은 적도, 홈쇼핑 시장 등으로 유통망을 넓힌 적도 없지만, 백화점과 부티크 판매만 고집했음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입지를 굳혔다. 2009년 연 매출 360억원, 1989년 브랜드를 만든 이후 지금까지 운영하는 매장은 34개. 1990년 갤러리아 백화점에 입점,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밀려나지 않은 유일한 브랜드이기도 하다.
비결은 한결같이 추구해 온 여성성(feminity). 매년 빠르게 변하는 유행 속에서도 늘 세 가지 지향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여자다움과 섹시함, 그리고 고급스러움. 이 세 가지를 놓친 옷은 아무리 근사하고 기발해도 입는 이를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는 게 손정완의 주장이다.
숙명여대 산업공예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옷을 남다르게 입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유신체제 아래 모두 몸을 낮추고 지내던 1970년대 말, 그녀는 홀로 굽 높이 10㎝가 넘는 하이힐을 고집했고, 알 없는 커다란 안경을 끼고 다녔다. 양장점에 가선 "원피스 지퍼 고리를 커다란 링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독특한 취향을 자랑했다.
의류회사에 다니던 친구는 그런 그녀를 보고 "넌 미대 나왔다고 화실을 차릴 게 아니라 디자이너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복장학원에 등록, 1980년대 중반 당시엔 유명했던 '뼝뼝'이란 의류 브랜드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했지만 주부 타깃의 지루한 옷을 만드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요지 야마모토, 장 폴 고티에 같은 디자이너의 작품을 동경하며 홀로 독특한 옷을 만들다가 선배들의 눈 밖에 났고,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 강남 압구정동에 '손정완'이란 이름으로 가게를 하나 냈다.
맑은 살구색, 터키 블루, 달콤한 초록과 분홍…. 화사한 색채로 가득한 그의 옷 가게는 문을 열자마자 당시 '옷 좀 입는다'는 이들의 아지트가 됐다. "색에 보수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잊고 있던 욕구를 일깨워준 것 같다"는 게 디자이너의 자체 분석. 1990년엔 갤러리아 백화점이 "젊은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며 입점 제안을 해왔고, 그 뒤론 탄탄대로였다.
2006년엔 프랑스 파리 캐주얼 의류 전시회 '후즈 넥스트(Who's next)'에 외국인 디자이너로선 최초로 초청돼 단독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손정완은 "돌아보면 참 좋은 시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0년은 손정완이 새롭게 출사표를 던지는 해다. 남성복 라인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 지난 4월 서울패션위크에서 처음으로 가을·겨울 남성복을 선보였다. 볼륨감 있는 재단, 자연스런 색채로 꾸민 그녀의 남성복은 부드러운 남성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효과적이다.
손정완은 "다가가기 편하고 자연스런 남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다"며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복 역시 도전하는 데 의의를 두기보단,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