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영화는 대개 '타이틀 시퀀스(Title Sequence)'부터 다르다.

흔히들 '오프닝 타이틀'이라고도 하는 타이틀 시퀀스는 영화가 시작될 때 영화 제목과 출연진 이름이 나오는 부분. 단순히 제작진·출연 배우 이름을 소개하는 걸 넘어 곧 시작될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관객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3'은 깨진 거울처럼 조각난 이미지, 거미줄에 달린 물방울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 관객을 긴장시켰고, '닌자 어쌔씬'은 독특하게도 영화 시작이 아닌 끝날 무렵에 피가 흐르는 듯한 글씨체와 소용돌이치는 검의 이미지를 제시해 충격을 줬다. 이 두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는 모두 한국인 이희복(32·사진)씨의 작품. '타이틀 시퀀스의 마법사'로 불리는 카일 쿠퍼(Cooper)와 일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이희복씨가 미국으로 건너온 건 1998년. 서울예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미대를 갈 것"이란 주변 기대와 달리 4년제 대학 입시에 모조리 낙방했다. "입시미술에선 공식대로 작품을 잘 만들어서 내놔야 하는데, 시험날 무슨 생각이었는지 엄청 튀는 그림을 그리고 나왔어요.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부모님은 재수를 권했지만 입시준비로 시간을 보내긴 싫었다. 그때 "삼성디자인학교란 곳이 있는데 2년 정도 한국에서 공부하면 외국 학교로 갈 수가 있다더라"는 말을 듣고 SADI 시험을 쳤고, 2년 동안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하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부로 편입했다.

미국 대학에서도 그는 튀는 학생이었다. 디지털 그래픽에 빠져 선생님이 내는 숙제마다 "난 디지털로 만들어 내겠다"고 우겼고, 3D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 그를 발견한 건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 권위자로 꼽히는 댄 보야스키(Boyarski) 교수. 보야스키 교수는 "대학생이 이런 작품을 만드는 게 놀랍다"며 각종 연구의 일부를 이씨에게 맡겼다. 행운의 시작이었다.

이희복씨가 만든 영화 타이틀 시퀀스 중 일부 장면.‘ 닌자어쌔씬’(위),‘ 스파이더맨 3’(아래).

보야스키 교수와 작업하다 졸업 후엔 미디어 아트 회사 '피타드 설리반(Pittard Sullivan)'에 스카우트됐고, 5년 전부턴 영화 타이틀 시퀀스의 거장(巨匠)으로 꼽히는 카일 쿠퍼가 차린 회사 '프롤로그 필름스(Prologue Films)'에 입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있다. 이씨는 "서울에서 대학입시에 성공했다면 그런 기회를 얻진 못했을 것"이라며 "입시에서 쓴잔을 마셨던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말했다.

그가 영화 타이틀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효과적인 은유(隱喩). 영화 전체의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내는 게 가장 어렵다고. 영화 '스피드 레이서' 작업 땐 미래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피드 레이싱을 표현하기 위해 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와 소용돌이를 사용했고, '슈퍼맨 리턴스'에선 슈퍼맨의 부활을 상징하듯 광선을 뿜어내는 듯한 투명한 글씨체를 활용했다. 이씨는 "영화 타이틀 시퀀스는 글씨체와 음악, 다양한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또 다른 이야기"라며 "어쩌면 난 그래픽을 만들고 있지만, 사실 다른 방법으로 작은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스스로를 "과도기에 자라고 공부한 덕에 행운을 누린 디자이너"라고 말했다. "제가 학교에 들어갈 땐 막 3D 그래픽이 태동하고 있었어요. 일을 얻을 땐 영화 타이틀 시퀀스 작업이 중요한 예술장르로 떠오르고 있었고요. 바로 그런 순간마다 훌륭한 거장을 만나 공부하고 일을 얻었으니 전 과도기가 낳은 행운아인지도 모르죠."

이씨의 새 목표는 "한국을 보다 적극적으로 할리우드에 알리는 것"이다. 영화 가수 비(정지훈)가 출연했던 영화 '스피드 레이서'와 '닌자어쌔씬' 타이틀 작업에 참여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이씨는 "현재 미국 영화사 '마이바흐 앤 커닝햄 필름스(Maybach & Cunningham Film s)'와 함께 한국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