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풍운아 이천수(29)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왔다. 지난 17일 사우디 알 나스르 클럽을 탈출하다시피 벗어나 귀국,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천수에 따르면 알 나스르 구단은 임금 체불을 밥먹듯 했고, 아직까지 8억여원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참다참다 도저히 더이상은 사우디에 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돌아왔다고 했다.
이천수는 부평고과 고려대 시절에 특출난 기량으로 한국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기대주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조커로 출전, 폭발적인 스피드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2003년에는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스페인리그(레알 소시에다드)에 진출했다. 2005년에는 K-리그 MVP가 됐다.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 짜릿한 프리킥 한방으로 골맛도 보았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이천수였지만 지금 그는 임금을 체불 당한 고급 노동자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지난 20일 이천수를 서울 시내 모 식당에서 어렵게 만났다. 지난해 6월 임대 신분으로 뛰던 전남 드래곤즈와 마찰을 빚고 사우디로 떠난 후 9개월 만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것 외에는 외모상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차 때문에 잠을 잘 못잤다"고 했고,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많지 않은 나이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천수와 2시간 동안 단독 인터뷰했다.
▶총 8억을 받지 못했다
이천수는 지난해 7월초 원 소속구단 페예노르트(네덜란드)와 알 나스르의 이적 계약이 성사돼 사우디로 갔다. 그 과정에서 전남 구단과 신경전까지 불사했다. 현재 이천수는 K-리그에선 임의탈퇴 선수 신분이다. K-리그에 복귀하기 위해선 전남 구단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큰 상처를 입고 진출한 사우디 또한 이천수에게 낙원은 아니었다.
이천수 측에 따르면 알 나스르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않았다. 이천수가 밝힌 임금 체불 금액은 약 8억원이었다. 알 나스르는 지난해 7월 이후 지금까지 3개월의 급여와 사이닝 보너스, 수당 등을 주지 않고 있다. 이천수는 구단과 월 1억원에 가까운 기본급과 수당, 사이닝보너스를 받기로 합의했다. 처음 계약과 함께 주겠다던 사이닝보너스는 8개월이 지났지만 받지 못했다. 급여는 진출초기부터 제때 지급되지 않았으며 지난 11월부터 체불금액이 더욱 쌓여갔다.
중동 언론이 이천수의 방출설을 첫 보도한 11월부터 구단과의 마찰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다른 동료들이 말 한마디 못하고 있을 때 이천수는 토트넘에서 뛰었던 이집트 국가대표 호삼 갈리와 함께 구단에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천수는 "힘들게 사우디에 갔기 때문에 팀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뛰었다. 지난해말 5연승을 달리며 순위도 많이 끌어올렸다"면서 "하지만 구단은 선수들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급여를 3개월이나 주지 않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알 나스르 부사장, 사무국장 등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별도로 만났다. 그때마다 그들은 이천수에게 "기다려라. 후원사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까지는 반드시 주겠다"고 말했다. 알 나스르는 사우디텔레콤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구단 수뇌부의 말은 번번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약속을 어길 때마다 감독, 사무국장 등에게 돈을 달라고 얘기했고, 받지 못하는 일이 수개월째 반복됐다. 이천수 측에 따르면 이렇게 돈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인샬라(신의 뜻에 따라)'라는 이해 못할 변명까지 들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이천수가 팀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올초 원정 친선경기가 잡혀 있었다. 이천수는 목 근육통이 있어 통역을 통해 구단 의무팀에 원정 참가가 힘들다는 뜻을 전달하면서 감독에게 전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천수는 며칠 후 구단 원정에 무단 불참했다는 이유로 벌금 4000만원을 내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여권 금고를 들고 나오고 싶었다"
이천수는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부사장, 감독, 사무국장이 모두 보는 앞에서 얘기했다. "좋다. 벌금을 낼테니까, 지금까지 밀린 임금을 달라. 그리고 내 여권과 비자를 갖고 와라."
이천수는 유럽 이적시장이 열린 지난 1월초부터 2월말까지 알 나스르를 떠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해왔다. 그는 "알 나스르는 프로가 아니었다.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빨리 떠나고 싶어 구단이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여권을 달라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통 프로축구선수들의 여권은 프로구단이 한데 모아서 관리한다. 왜냐하면 국외 원정 경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통합 관리하게 된다. 사우디는 프로구단이 선수들의 출입국을 허가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고 있다. 이천수가 마음을 먹어도 사우디를 떠날 수 없는 힘든 상황이 계속됐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사우디프로축구연맹과 사우디축구협회까지 찾아갔다. 그들은 구단 수뇌부에 전화를 걸어 돈을 주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때 뿐이었다.
이천수는 구단주가 2월말까지는 밀린 급여를 해결하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또 거짓이었다. 이천수는 구단 사무실로 찾아가 "당장 내 여권과 비자를 갖고 오라"고 했다. 이천수의 큰 소리에 구단 관계자는 놀랐고, 사무국장은 "여권이라도 가져가라"고 했다. 당시 이천수는 여권 안에 출국 비자가 2개월 살아 있었던 걸 몰랐다. 옆에 있던 주무가 여권이라도 받으라는 눈치를 주었다고 했다. 실제로 여권엔 출국이 가능한 비자 기간이 남아있었고, 어렵게 이천수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현재 이천수 측은 국제축구연맹(FIFA)에 보낼 임금 체불 등 알 나스르에서 당한 고초를 입증할 자료를 취합하고 있다. 8억원의 돈은 꼭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남아공월드컵 갈수만 있다면 단 5분이라도 죽도록 뛰고 싶다
이천수와 알 나스르의 계약 종료 시점은 오는 6월말쯤이다. 사우디 정규리그는 이미 종료됐고, 걸프클럽챔피언십 두 경기만 남았다. 그동안 FIFA는 임금 체불 3개월 이상이면 선수가 그 구단을 떠나 다른 새로운 구단과 계약해도 선수쪽 손을 들어주곤 했다.
이천수는 현재 뛸 팀을 구하고 있다. 자신을 낮추기로 했다. 몸값을 깎아 손해를 보더라도 경기에 출전만 할 수 있다면 계약을 하겠다는 자세다. 이천수는 "선수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남아공월드컵 출전의 꿈을 여전히 갖고 있다"면서 "급여 문제로 복잡했지만 그라운드에선 열심히 뛰었다. 지금 아픈데도 없고 그 누구보다 컨디션이 좋다. 남아공에 갈수만 있다면 5분이라도 죽도록 뛰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출전이 가능한 팀을 물색 중이다. K-리그는 전남이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어 진출이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일본 J-리그는 이천수에게 관심이 있는 팀이 제법 있다고 복수의 에이전트들은 말한다. 이천수는 "제가 살아있고 여전히 대표팀 경기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팀에 갈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