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은 1971년 3월 한 잡지사 청탁으로 '미리 쓰는 유언'이란 글을 썼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법정 스님이 진짜로 남긴 유언이 17일 공개됐다.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말빚'은 '말로 남에게 진 빚'을 뜻한다(표준국어대사전).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신 뒤 친구에게 '빚진 닭을 대신 갚아주게'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스님이 진짜 갚아야 할 말빚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육신이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마루에 서니 그간 남긴 말과 글을 이승의 업보와 허물로 여긴 듯하다는 풀이가 많다.

▶서점에선 벌써 스님의 책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어느 서점에선 300권이 2시간 만에 다 팔렸고, 인터넷에서는 이미 절판된 책이 웃돈 거래되기도 한다. 스님은 책을 낼 때 10년 단위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 한 출판사는 스님 입적 전에 2권의 책을 내기로 계약했고, 책 머리말까지 구술(口述)로 받았다. 법적으론 출판사가 계약서대로 책을 낼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럴 경우 스님 유지를 어겼다는 비난을 감당해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는 41세로 죽기 직전 모든 원고를 불태우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브로트는 미발표 소설과 일기, 편지까지 모아 책을 냈다. 유언을 어겼지만 그 덕분에 살아있을 때는 무명작가에 지나지 않았던 카프카는 불멸의 작가가 됐다.

▶스님은 맑고 쉬운 글로 불교 대중화에 기여했기에 문학승(文學僧)으로도 불린다. 출판사들이 자율적으로 절판을 결의한다면 모르되, 그 책을 찾는 독자들의 편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두 절판시키기로 한다면, 그 책을 찾는 독자들이 언제 어디서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님의 '말빚'으로 얻는 수익금으로 장학재단을 만들 수도 있다. 불교는 언외(言外)의 진리를 찾는 종교다. 스님의 유언 바깥에 스님의 참유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