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1번 출구 바로 뒷골목에는 오래된 금형(金型)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른바 '금형공장길'로 불리는 곳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700여개에 이르던 공장들은 이제 왕십리 뉴타운 개발 계획에 밀려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60여곳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1969년 '금형공장길'에 터를 잡은 현대금형 김학설(62) 사장도 40년 넘게 정든 이 동네를 조만간 떠나야 할 처지다. "여기서 내 평생을 묻었지. 일손이 달려 끼니를 걸러가며 일요일에도 나와 금형을 다듬기도 했고, 친동생들을 불러서 일도 시켰는데…."
15일 찾은 어두컴컴한 50여㎡(15평) 크기의 공장 겸 사무실에서는 밀링머신(공작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직원은 달랑 1명. 김 사장은 "한창 경기가 좋던 1990년대 초반에는 12명까지 뒀는데 이제는 사양산업이지 뭐"라고 했다.
◆"맨손으로 금형을 다듬어"
그는 1948년 경기도 화성 출신이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17살 때 무작정 상경, 을지로 7가에서 금형기술을 배운 뒤 1969년 9월 19일 왕십리에 정착했다. 그는 처음 왕십리에 오던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금형공장이 4곳밖에 없었다고 했다. '꼬마(조수)' '한빠(보조원)'를 거쳐 '기술자' 자리에 올랐고, 스물세살 때 자신의 공장을 차릴 수 있었다.
금형공장 사장들이 대부분 그렇듯 김 사장도 중학교만 나와 학벌이 그리 좋지는 않다. 그는 "공부할 돈도 없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기술 배울 시기를 놓친다"고 했다. 대신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 '못 배운 한'을 풀었다. 큰아들은 전자공학과 박사 과정, 작은아들은 구청 공무원이다.
1970년대만 해도 왕십리 금형공장은 수작업이 주류였다. '다가네(망치)'와 '야스리(줄)'를 가지고 직접 손으로 금형을 다듬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이고 굳은살이 박여 있다. 여기서는 "손가락이 두 개 잘리면 공장장이고, 세 개 잘리면 사장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위험하고 힘든 일이란 얘기다. 김 사장은 "옛날엔 주로 노란 주전자 뚜껑이나 검은 전화기를 만들 때 쓰는 '빼꾸'를 많이 만들었지"라고 말했다. '빼꾸'는 합성수지의 일종인 베이클라이트를 말한다.
왕십리 금형공장길이 현대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이다. 김 사장도 그때 방전기를 사들이면서 수작업을 접었다. 이때가 금형공장길의 화려한 시절이었다. 경기 호황을 타고 "왕십리에 가면 못 만드는 것이 없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기업들로부터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오랜 생활고도 면할 수 있었다. 덕분에 어엿한 아파트도 장만했다. 김 사장은 "기술력을 인정받고 거래처 확보를 위해 애쓴 결과"라며, 그전까지는 "직원들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고 전했다.
◆작은 공장들의 얽히고설킨 분업체계
왕십리 금형공장길의 경쟁력은 '마찌꼬바'라 부르는 독특한 분업체계에서 일어난다. 현대금형도 거래처에서 발주하면 근처 관계 공장으로 이뤄진 조직화한 연계망을 통해 완성품을 만들어낸다. 조각가공은 삼일조각, CNC(컴퓨터수치제어) 가공은 동일CNC, 시험사출은 부암정밀, 철재가공은 동명철재, 이런 식이다. '마찌꼬바'는 사전적으로는 '읍 정도 규모에 있는 소규모 공장'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작은 공장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망'을 일컫는다.
이런 왕십리 '마찌꼬바'도 뉴타운 개발에 따라 하나 둘 성수동이나 용두동, 마장동으로 옮겨가면서 해체되고 있다. 시내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공장은 더 멀리 경기도 마석, 남양주, 구리, 성남 등까지 밀려갔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저가의 중국 금형제조업이 발전하면서 타격을 입어 문을 닫은 곳도 부지기수다.
금형공장길은 행정구역으로는 성동구 하왕십리동 855번지 이문께1길이다. 금형공장 사람들은 이 길을 '큰길'이라 부른다. '큰길' 안에서 서로 거래처를 이어주기도 하고 쇳가루로 컬컬해진 목을 '니나노집'(접대부가 있는 술집)이나 곱창거리에서 씻어내곤 했다. "송년회 때는 큰길 삼거리에서 길을 막고 돼지를 잡아 도라무통 반을 잘라 구멍 뚫고 불 피우고 구워 먹고 그랬지."
금형공장 길 주변으로 즐비하던 식당, 다방들도 다들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 금형공장 장부가 따로 있어 월말에 한꺼번에 밥값을 계산한 우리식당, 일찍 출근하는 공장 사람들을 위해 새벽부터 문을 열던 영광식당, 이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금형공장 사람들에게 사의(謝意)로 무료 음식을 제공했던 성동감자탕, 이제 모두 떠나고 없다.
2002년 왕십리 뉴타운 개발이 확정되면서 금형공장길은 역사 속으로 저물고 있다. 금형공장, 왕십리 똥파리, 자개시장, 봉제공장 등 왕십리라는 지역을 특징짓는 단어들은 도심 재개발에 따라 이제 기억 속으로 숨어들었다. 김 사장은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있나, 다 그런 게 인생이지"라고 했다.
사라져가는 왕십리 뉴타운 지역에 대한 기록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두 권으로 모아 정리한 '왕십리 뉴타운 조사보고서'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