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도 역사상 완벽하게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는 김재엽이 유일하다. 4단계 선수권(청소년, 대학, 아시아, 세계), 유니버시아드, 아시안게임, 월드컵, 올림픽. 지구촌에서 열리는 모든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 자칫 자신을 어둠의 세계로 밀어넣을 뻔한 불 같은 사나이 기질을 매트 위에서 폭발시켜 세계 투기사에 멋진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지금은 동서울대학 스포츠경호학부 교수로 있으며, 최근 박사학위도 받았다. "두 번 다시 못 할 게 유도와 박사학위"라는 그는 요새 격투기에 푹 빠져 있다. 링만 보면 피가 끓는다. 오죽했으면 수업에 이종격투기 과목을 다 넣었을까. "추성훈하고 한 판 붙고 싶어요. 조금만 젊었어도 당장 판 벌였을 겁니다." 이렇게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싶다. |
LA올림픽 금빛 꿈 빼앗은 '곰탕 한 그릇' |
혹독한 체중감량 허기 못참고 경기 직전 식당 찾았다가 낭패 유도 맛들여 진학한 중앙중선 폭력서클 선배 등쌀에 곤욕 에이스 황광훈 도움 받아 계성고 진학 …실업입단 때 빚 갚아 |
▶유도와 싸움의 차이
대구 남산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 코치를 따라 유도장에 간 적이 있다. 과거 일본인들이 지었다는 대구시청 옆 경북유도체육관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서로 던지고, 날아다니고 하는 게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사실 멋진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2학년 때부터 공을 찼는데 돌연 팀이 해체됐다. 그러자 코치가 아이들을 데리고 유도장에 간 것이다. 나중에 유도부가 창단되고 코치가 사범으로 변신하면서 알았다. 코치가 축구보다 유도를 더 잘한다는 사실을.
어차피 축구는 종친 마당이라 축구부원 상당수가 도복을 입었다. 5학년 때부터 전국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초등부는 체급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단체전에 나서면 6학년도 걸리고, 깍짓동도 걸렸다.
"솔직히 유도가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낙법 치면 아프고 그래서요. 대신 작은 체구로 큰 덩치를 쓰러뜨릴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에 묘미를 느꼈죠."
씨름꾼 할아버지, 복싱을 한 아버지의 피를 받아 어릴 때부터 힘도 좋고, 근성도 있었다. 운동선수로는 제격이었다.
유도에 맛을 들여 중앙중학교에 진학했더니 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폭력서클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주먹깨나 쓰는 3학년 선배들이 불렀다. 이미 소문 들은 모양이다. 유도 잘하고, 힘도 좀 쓴다는. 그러니 발뺌도 못 하고 꼼짝없이 불려다닐 수밖에.
게다가 선배들이 시키는 싸움에서 한 방에 이기는 바람에 선배들 마음에 쏙 들고 말았다. 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몰려나가 동성로를 휘젓고 다녔다. 향촌동 무리와의 기싸움, 구역싸움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게 아니다 싶은 데도 재밌더라고요. 쫄바지 입고 다니며 폼잡는 것도 좋았고, 패싸움 끝내고 회식하는 게 멋있기도 했죠. 영화에 멋지게 나오는 보스들의 모습을 동경했던 모양입니다."
그 생활은 1년 반 동안 계속됐다. 운동이 될 리 만무했다. 싸움은 늘 이겼지만, 유도는 판판이 졌다. 그러다 어느 날 사범에게 걸려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맞았다. 벼르고 별렀던 모양이다. "깡패짓 하려고 운동 배웠냐"며 정말 안 죽을 만큼 팼다.
그 일을 계기로 어둠에서 발을 뺐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주먹질하고 돌아다니느라 메달 하나 못 딴 것이다. 특기생 진학에는 메달이 필수인데.
어금니 물어 봤지만, 3학년 중-고연맹전에서 동메달 하나 건진 게 전부였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제대로 하려면 계성고에 가야 하는데 거기서 아무 얘기가 없었다.
결국, 황광호라는 친구에게 업혔다. 운동 바닥에선 에이스를 스카우트한 학교에 진학이 난감한 후보 한둘 끼워 보내는 게 관례다. 중앙중에서는 황광호가 에이스였고, 그에게 덤으로 얹힌 것이다.
▶빨래, 그리고 먼지털이
유도부 동기 다섯 중 혼자 후보였다. 훈련은 같이 해도 경기장 가면 물수건 들고 다니며 동기들 안마나 해주고 그랬다.
빨래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3학년 선배 아홉 명이 있었는데 그들 빨래를 도맡았던 것이다.
운동 끝나면 도복은 땟국이 줄줄 흘렀고, 쉰내가 진동했다. 특히 여름에는 악취가 말도 못했다. 게다가 당시 도복은 깃에다 짚을 넣어 여간 두껍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숙소에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하나 솔로 박박 문질러야 때가 지고 냄새가 빠졌다. 그 도복을 자기 것 포함해 매일 열 벌씩 빨아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어차피 19명의 유도부원 중에서 후보는 딱 하나였으니. 다 빨자면 세 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 시간에 다른 부원들은 휴식을 취했고.
"너무 힘들고 화가 나 선배들 도복에 오줌도 누고 그랬습니다. 빨리 떨어지라고 솔로 찍거나 세게 문지르기도 했고요.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너무 서럽더라고요."
어느 날 죽도록 도복을 빨아 널어놨더니 밤새 비가 내려 다 젖고 말았다. 아침에 초비상이 걸렸다. 3학년 선배들이 바깥으로 불러냈다. 철봉 옆에는 봉걸레 자루 대여섯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선배들이 내릴 벌은 '먼지털이'. 철봉에 매달리게 한 뒤 돌아가며 열 대씩 패는 속칭 '줄빳따'다. 선배들은 몽둥이를 물에 적셔 때렸다. 90대 다 맞기 전에 철봉에서 떨어지면 처음부터 다시였다. 어금니 물고 그 무서운 매를 다 맞아냈다. 엉덩이가 너덜너덜 터진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후유증이 심각했다. 한 달 동안 제대로 앉지도 못했고, 잘 때도 엎드려 자야 했다.
"그러면서 독기가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온갖 설움과 핍박을 받으면서요. 빨래하면서 팔심도 많이 좋아진 것 같고요."
지금은 허허 웃지만, 고1짜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폭력이었다. 이유도 가당찮고.
▶세 번의 탈출과 어머니
먼지털이는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차라리 강패짓이 낫겠다' 싶어 그날 숙소를 뛰쳐나갔다.
어머니 주머니에서 여비 3000원 챙겨 모자 푹 눌러 쓰고 울산 방어진으로 내뺐다. 유도 그만두겠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맞는 것도 싫었다.
방어진 시장통에서 순대로 허기를 달랜 뒤 여인숙에 들어갔다. 방값은 400원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데 거기도 지친 몸을 편히 눕힐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속도 상하고, 머리도 복잡한데 옆방에서 들리는 얄궂은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당시에도 여인숙은 '19세 이상 투숙가'였나 보다.
견디다 못해 복도로 뛰어나가 차례로 방문을 두들기며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다 주인하고 대판 싸웠다. 힘이나 싸움으로는 안 질 자신 있는 데다 한동안 어두운 데 발 담근 적도 있는 터라 겁날 게 없었다.
다음날 황광훈에게 연락했더니 걱정이 여간 아니었다. "난리 났다, 빨리 와라. 잘못하면 학교 잘린다. 그러다 깡패 된다." 그 말에 발길 돌릴 것 같았으면 애당초 버스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여인숙 생활 3일째 되던 날 아버지가 불쑥 찾아오셨다. 황광훈을 족쳐 자초지종을 들으신 모양이었다.
학교로 돌아갔으나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얘기를 들은 사범이 선배들을 조지자 선배들 핍박은 더욱 거세졌다. 빨래 당번도 변함 없었고. 그래서 "차라리 깡패 하겠다"며 다시 밤거리를 누비다 아버지한테 걸려 늘씬하게 맞았다.
이번엔 청도 얼음골로 도망갔다가 돈 떨어져 돌아왔고, 얼마 후엔 해인사로 튀었다.
"해인사 가서 팔만대장경도 둘러보고, 법당에 들어가 절도 하고 그랬습니다. 절하면서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부처님께 원망도 늘어놨습니다. 그때도 한 사흘 정도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어머니가 힘들어 하셔서요."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 있을까. 외아들이 그토록 방황하는데.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어머니는 죽어 버리겠다며 넥타이로 당신 목을 조르기까지 하셨다.
사실 그 바람에 정신차리고 도복을 새로 입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 숙소 풍토도 싹 바꿨다. 3학년들도 자기 도복은 자기가 빨아 입는 것으로.
▶튜브 좀 당겼을 뿐인데...
황광훈은 정말 잘했다. 1학년 때부터 전국체전에 나갔고, 청소년대표로 뽑혀 국제대회에서 동메달도 땄다. 부럽기도 했지만, 우선 넘어야 할 장애물이기도 했다.
한데 언제부턴가 야릇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날 때마다 황광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10시에 똑같이 취침하는데.
처음엔 '이놈이 몽유병인가' 했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지켜 봤더니 자는 척하다가 12시만 되면 일어나 리어카 튜브를 들고 숙소를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매일 새벽 숙소 뒤로 돌아가 철봉에 튜브를 매 놓고 1시간씩 당기기 훈련을 해 왔던 것이다. 사실 유도나 씨름에는 그만한 운동이 없었다.
어느 날 그 친구를 불러 다그쳤다. "암만 네가 날 업고는 왔지만, 너만 1등 하기냐. 같이 좀 잘하자. 나도 1등 한번 해 보자." 그러면서 12시에 깨워 달라고 했다.
그날부터 새벽훈련을 시작했다. 자정에 깨우면 같이 나가 달빛 아래서 한 시간씩 튜브를 당겼다. 몇 달 그렇게 했더니 시나브로 몸의 감각이 달라져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빨래 당번을 면했고, 훈련 때 3학년 선배를 메다꽂아 중-고연맹전 출전 기회까지 얻었다. 가장 낮은 체급인 60㎏ 이하의 엑스트라 라이트급으로. 그날 판판이 이겨 계성고가 우승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협회장기, 전국체전 등등 전국대회를 싹쓸이했다. 전무후무한 계성고의 단체전 16연승 대기록도 그 시절 만들어진 것이다.
체급이 가장 낮으니 단체전 뛰면 늘 1번이었다. 선봉으로 나가 가볍게 물꼬를 터주는 기분, 시상대 맨 위에 오르는 짜릿함을 맛보면서 유도에 재미를 붙여갔다.
2학년 겨울방학이 되자 강의석 송순일 윤익선 같은 국가대표급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한번 잡아달라"고 머리를 숙였다. 실은 훈련보다 상대 분석이 목적이었다.
애송이의 열정이 기특했는지 선배들은 갖은 기술로 고수의 위력을 과시했다. 훈련 끝나면 숙소에 들어가 상대에 대해 빠짐없이 메모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던가. 3학년 봄에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그들을 모조리 꺾고 우승했다. 선배들은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며 기막혀 했지만, 버스 떠난 후였다.
태릉선수촌에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튜브를 당겼고, 83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친구 덕에 인생이 바뀐 셈이다. 그 친구 없었더라면 지금 주먹질이나 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세상 살면서 그보다 더 큰 신세가 어디 있을까.
안타깝게도 황광훈은 국민대에 진학한 뒤 술과 담배를 입에 대면서 그 좋은 기량을 제대로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내리막을 걸었다.
자신이 수렁에서 건져 준 빨래 담당 친구는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한국 유도의 간판이 됐는데.
"아시안게임 금메달 딴 게 계명대 4학년 때였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쌍용에 스카우트됐는데 그때 협상하면서 그랬죠. '황광훈 안 받아 주면 나도 안 가겠다'고요."
그래서 나란히 쌍용 도복을 입었다. 자칫 버려질 뻔한 자신을 계성고에 업고 간 에이스 황광훈. 그를 업고 실업팀에 간 것이다. 신세 갚는 데 딱 7년 걸렸다.
남산초등학교 2학년 때 공을 차면서부터 쌓은 둘의 우정은 지천명을 바라보는 지금도 변함없이 뜨겁다. 황광훈은 현재 대구 계명중학교 체육교사다.
▶감량의 고통, 승리의 희열 유도를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체중 감량이다. 일주일에 8~9㎏을 뽑아내는 과정은 가히 지옥이었다. 유럽 선수들과는 근본적인 힘에서 차이가 나니 체급을 낮춰 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평소 체중을 조절하면 힘이 없어 운동을 할 수 없으니 경기 일주일 전부터의 감량이 불가피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무조건 굶는다. 보통 밥 한 끼를 500g으로 본다. 아침에 뱀탕이나 쇠등골 500g 먹고 점심-저녁은 굶는다. 하루에 1㎏이 빠지는 셈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뛰어서 땀으로 뺀다. 목말라도 물을 금물이다. 흡수가 빨라 금세 체중이 붇는다. 그래서 정 급하면 야채를 씹은 후 뱉는 걸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그러니 경기일이 가까워지면 거반 해골이 된다. 이틀 전부터는 허기져 잠을 못 잔다. 베개를 껴안고 배를 누르며 근근이 버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선수촌에서 로드워크 나갔다가 쓰러져 사람들이 의무실로 데려다 준 적도 여러 번 있어요. 소변 보다가 변기 위에 쓰러진 적도 있고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고통과 노력 뒤에는 반드시 그만한 보상이 따랐다. 우선은 84년 LA 올림픽 은메달이다. 금메달이 가능했던 페이스였기에 미련이 남는 메달이기도 하다. 일본 호소카와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하도 허기져 한국식당 찾아가 곰탕 한 그릇 먹고 잠이 들면서 일을 망쳤다. 온몸이 나른하게 퍼지는 바람에 맥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남들은 '올림픽 은메달이 어디냐'며 위로했지만, 시상대에서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3년 후 독일 에센세계선수권 결승에서 호소카와를 다시 만났고, 종료 16초를 남기고 한판으로 화끈하게 설욕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올림픽에선 미국 귀화 일본인 아사노가 준결승에서 호소카와를 이겨 주는 바람에 편안하게 금메달을 차지했다. "LA에서 호소카와에게 지는 바람에 4년이나 운동을 더 할 수 있었죠. 그때 금메달 땄더라면 분명히 나태해져 은퇴했을 겁니다." |
▶타고난 쇼맨십 7년간 국가대표로 뛰면서 19개의 금메달을 거둬 들였다. 한데 신문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 매번 표정이 다르다고 한다. 의도적인 연출이었단다. "선수끼리는 깃만 잡아 봐도 대충 알거든요. 딱 잡아 보고 만만하면 일단 카메라 기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쪽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술 들어가고, 메치고 그러죠. 기왕이면 카메라에 멋있게 잡히는 게 좋잖아요." 여유가 생기면서부터는 알게 모르게 기자들을 배려하기도 했다. 후다닥 한판으로 끝내 버리면 순간적으로 사진을 놓치는 기자가 있을 것 같아 절반씩 두 번에 나눠 이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지도자나 팬들이 손에 땀을 쥐는 사이 정작 매트에 오른 선수는 별의별 쇼 다 해가며 상대를 갖고 놀았던 것이다. 정말 못 말리는 끼다. ▶혼탕 사우나의 위력 맨처음 유럽 갔을 때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훌렁 벗고 들어가는데 안에 벌거벗은 여자들이 있어 혼비백산했다. 혼탕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세상에 그렇게 훌륭한 구경거리는 다시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밋밋한 표정을 지으면서 볼 건 다 봤다. 체중 감량이 미흡하면 마지막엔 어쩔 수 없이 사우나에 들어가야 한다. 그 지옥 같은 사우나 땀 빼기도 유럽에서 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사우나에 들어가면 구경하느라고 오히려 나가는 게 싫다니까요. 체중이 절로 빠집니다." 한번은 파리의 사우나에 갔다가 체중계에 올라서는데 웬 남자가 다가와 엉덩이를 만졌다. 엉겁결에 따귀를 때리며 혼쭐을 냈는데 알고 보니 호모였다. 자신이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구경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솔직히 혈기왕성한 나이에 힘까지 넘치는 운동선수니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가끔씩 경기를 하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어요. 한창 누르기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사우나에서 봤던 여자가 눈앞에 떠오르는 겁니다. 기가 막히죠. 세상에 그런 긴박한 상황에 그 생각이 날 게 뭐란 말입니까." ▶서울올림픽 한복의 비밀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승한 후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다. 소속팀이 쌍용이라 저고리 양 어깨에 용 자수까지 얹었다. 마침 그날이 추석이라 경기 전부터 이래저래 신경 많이 썼다. 84년 LA 올림픽 결승에서 일본의 호소카와에게 분패하는 장면을 지켜본 국민은 이날 우승이 갑절로 감동적이었다. 게다가 한가위에 한복 차림으로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그만한 볼거리도 없었다. 한데 그 감격스런 장면을 보며 뒷목 잡고 쓰러진 사람이 여럿 있었다. 시상대 오르는 장면 하나 보고 수 년간 용품을 지원해 온 코오롱 액티브 관계자들이었다. 당연히 액티브 마크 찍힌 트레이닝복에 액티브 신발 신고 시상대에 오를 거라고 여긴 관계자들은 난데없는 한복 차림에 넋을 잃었고, 대한유도회 관계자들도 면목이 없어 "저런 정신나간 놈이 다 있냐"며 거품을 물었다. "신발은 신었어도 됐는데 하필 그날 따라 빨간색 프로스펙스 운동화가 너무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금메달 따고도 협회로부터 욕먹은 건 저밖에 없을 겁니다. 허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