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발행인이 이끄는 조선일보는 '논객(論客)의 시대'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논설위원들이 차례로 편집국장이 되어 신문제작을 책임졌다.
1958년 11월, 33세의 천관우가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9년간 편집국장을 지낸 성인기의 후임이었다. 1956년 1월 한국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겨온 지 2년 만의 발탁인사이기도 했다. 천관우는 "조선일보를 '중립지(中立紙)'라고 부르는데 여(與)와 야(野)의 중간지대로서 중립지가 아니라 여든 야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적극적 중립이 되어야 한다"(1958년 12월 조선일보 사보)는 입장을 견지했다.
1959년 9월 천관우의 후임 편집국장으로 역시 논설위원 송지영이 취임했다. 혁신계 인사인 그의 편집국장 취임에 대해 이승만 정권은 "송지영은 안 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발행인 방일영은 경무대에 찾아가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진다는 각서를 썼다. 송지영은 5·16 후 '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되어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8년 2개월 만에 출옥했다.
1961년 1월 편집국장이 된 최석채는 이승만 정권의 압력으로 대구매일을 그만둔 직후 조선일보에 입사한 '비밀 논설위원'이었다. 사설 '호헌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를 써서 4·19의 불길을 지핀 그는 5·16 직후 편집국장에서 물러났다. 최석채는 선우휘와 함께 조선일보에서 해고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계속 무기명으로 글을 썼다. 이른바 '유령 논설위원'이었다. 2000년 5월 IPI(국제언론인협회)는 그를 '20세기 언론자유 영웅' 50인에 선정했다.
최석채의 뒤를 이은 편집국장도 중앙대 교수 출신으로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낸 윤주영이 발탁됐다. 당시 33세였던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편집국장을 맡았다. 취재기자 경력이 없는 그였지만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 하야' 기사를 직접 취재해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후 문화공보부장관·국회의원 등을 지낸 그는 1980년대부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입력 2010.02.2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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