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얼굴 괜찮아요? 어제 오랜만에 정현이(국회의원 유정현) 부부랑 식사했는데 갑자기 발동이 걸려서 폭탄주를 새벽 1시 반까지 마셨어요. 오늘 스케줄 많은 거 뻔히 아는데도 뭐 '렉서스 브레이크'를 달았는지 제동이 잘 안 되더라고요. 하하하."
10일 오전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 나타난 정보석(48)은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손을 내밀었다. 3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 중인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거의 '투명 인간' 대접을 받는 존재감 없는 가장으로 짠한 웃음을 전해주는 그다. 아내, 자식, 장인어른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도 아무런 대꾸도 듣지 못하는 정보석을 보면서 TV 앞 아버지들은 자꾸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밖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가정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는 우리 40~50대 남성들을 대변하는 것 같다"며 "가정의 중심이 자꾸 아이들 위주로 흘러가다 보니까 아버지들이 종종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을 정말 아프게 하는 건, "그래도 극 중 보석이 부럽다"는 의견을 보내는 아버지 시청자들.
"장인어른한테 그렇게 구박받고 가족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보석이 처지가 부럽대요. 돈 많은 장인 만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으니까요.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그런 말씀을 하시겠어요. 제가 좀 더 망가지더라도 그분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얼핏 연약해 보이는 외모지만 정보석은 한국의 40~50대 배우 중 가장 강렬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싸늘한 이기주의자('달콤한 인생')와 남들 눈치만 보며 기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어수룩한 소심남('지붕뚫고 하이킥'), 그리고 세상을 한 손에 쥐고 싶어하는 전쟁 영웅('대조영')을 수시로 오가며 대중의 환호를 끌어낸다. 그는 "정말 운이 좋게도 매번 전작(前作)과 다른 느낌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이 다가왔다"며 "'정보석은 이런 배우'라는 인식이 세간에 퍼지면 스타성은 생길지 몰라도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지붕뚫고 하이킥'은 어린 팬들을 처음으로 선사한 작품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유치원생들까지 저를 길에서 알아보고 따라오게 됐다"며 " '빵꾸똥꾸' 아빠로 불리고 있는데 기분이 좋다"고 했다.
86년 MBC 창사 특집 드라마 '젊은 날의 초상'으로 데뷔한 그는 당초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가 "연기가 엉망"이라는 이유로 촬영 하루 만에 단역으로 전락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곧 '사모곡', '하늘아 하늘아' 등의 사극을 통해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 '사모곡'은 시청률이 70%가 넘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당시 지방에 촬영하러 가면 만강이(길용우) 괴롭히지 말라고 저한테 돌을 던지는 할머니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는 "당시 한 3년간은 3편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겹치기 출연을 했을 정도로 밤잠을 자지 않고 촬영에 매달렸다"며 "그때 작품들을 보면 뼈만 남은 창백한 얼굴이 도드라져 저도 깜짝 놀랄 정도"라고 했다. "야 '어떻게 저 얼굴로 배우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말도 못하게 고생했죠."
그는 이어 "사실 제가 잘 생겼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것도 한 10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제가 데뷔할 때는 남궁원, 최무룡 선생님처럼 선 굵은 외모가 잘 생긴 남자의 표준으로 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기준이 많이 바뀐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보석은 차가워 보이는 외모에 비해 구수한 음성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배우로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라며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너무 깔끔한 제 이미지를 상쇄시켜주고 있다"고 했다. "사실 저 같은 이미지의 배우가 차가운 느낌의 목소리까지 갖고 있었으면 뉴스를 진행해야 했을 겁니다. 어려서 시골에서 살았는데 그때 영향으로 이런 말투를 갖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