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전쟁으로 조선일보는 존폐(存廢)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6월 27일까지 발행되던 신문은 북한군의 서울 점령으로 발간이 중단됐고 방응모(方應謨) 사장은 7월 6일 납북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지만 서울로 돌아온 조선일보 관계자들은 신문을 다시 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조선일보 인쇄시설의 일부가 미아리고개와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서 발견돼 인쇄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가 조선일보 속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발행인 겸 편집인인 방응모 사장이 납북돼 신문발행의 책임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에 조선일보는 10월 2일 발행인과 편집인을 분리키로 하고 발행인은 방응모, 편집인은 최용진(崔鎔振)으로 바꿔서 공보처와 협상을 벌이는 한편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대표취체역에 전택보(全澤珤)를 선임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선일보는 10월 23일자로 속간호를 낼 수 있었다. 국민일보가 9월 28일, 서울신문이 10월 1일, 경향신문과 동아일보가 10월 4일 속간호를 낸 것에 비해 3주 정도 늦었다. 그나마 타블로이드 한 장, 즉 1면과 2면이 전부였고 기사도 전황 보도가 전부였다. 간혹 사설이 실렸을 뿐 인기 고정란이었던 팔면봉(八面鋒)이나 소설 등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마저도 이듬해 1월 3일자까지밖에 내지 못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속간후 이때까지 나온 신문을 조선일보 '제1차 전시판(戰時版)'이라고 부른다.
1·4후퇴로 뿔뿔이 흩어져 피란했던 조선일보 사원 40여명은 다시 부산에 모여 신문 발행을 결의했다. 우선 대표취체역 전택보 소유의 부산 남포동2가 19번지 창고에 조선일보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방응모 사장의 손자 방일영(方一榮)이 신문제작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영도다리 옆에 있는 철수선을 합숙소로 삼고, 공무국은 작은 인쇄소를 빌려 1951년 2월 1일자 석간부터 어렵사리 재속간을 하게 됐다.
'제2차 전시판'은 모든 것이 제1차 전시판보다 열악했다. 게다가 부산 지역의 4개 일간지 외에 서울에서 내려온 10여개 신문들이 북적거려 신문 판매 경쟁 또한 치열했다. 2월 2일자부터 김규택(金奎澤) 화백의 만평과 함께 팔면봉 등이 부활한 것도 신문들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제2차 전시판은 2월 28일자로 끝이 났다. 서울이 재수복됐기 때문이다.
3월 중순 서울로 올라온 속간 준비요원들은 파손된 윤전기부터 복구했다. 훗날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하게 되는 선우휘(鮮于輝)는 1·4후퇴 당시 신문사 시설 소각명령을 받았던 육군대위였다. 그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명령에도 불구하고 막상 민족지의 사옥에 불을 지를 수는 없어 활자판만 뒤엎었다."
부산에서 사원들이 속속 복귀하면서 조선일보는 4월 21일 다시 속간호를 낼 수 있었다. '제3차 전시판'이었다. 이때는 다른 중앙지들이 속간호를 내지 못해 조선일보는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신문이었다. 그러나 '제3차 전시판'은 6일간만 발행됐다.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밀려 4월 24일 서울 재철수령이 내려진 때문이었다.
세 번째 피란에 나선 조선일보 사원들은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평판인쇄기와 활자를 트럭에 싣고 한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대전. 그러나 수원에서 트럭이 고장 났고 전황도 대전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 방일영을 비롯한 조선일보 사원들은 수원에서 신문을 발행키로 결정했다. 당시 수원경찰서장 최정득(崔正得)의 도움으로 경찰서 앞에 있던 도립병원 사택을 임시사옥으로 삼았다. 반파된 사택에 '조선일보사 수원임시발행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거적으로 바람을 가린 채 신문 발행을 준비했다. '제4차 전시판'은 5월 3일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런 조건에서도 유건호 방낙영 전동천 등의 기자는 전황뿐만 아니라 피란생활의 이모저모를 취재했다. 또 통신 뉴스가 없던 때라 중고 라디오 한 대를 구입해 새 소식을 하나라도 더 신문에 담아냈다. 이를 '알피(RP)通信'이라 불렀다. RP는 'Radio Press'의 약자로 '라디오를 듣고 쓰는 뉴스'라는 의미다. 실제 신문기사 맨 앞에 【東京○發 RP水原通信】이라고 표시했다. 동경발 뉴스를 수원에서 라디오로 듣고서 보도한다는 뜻이다. '제4차 전시판'은 7월 31일자까지 나왔다. 서울이 완전수복됐기 때문이다.
1951년 8월 1일부터 조선일보는 서울 본사에서 정상적으로 신문을 제작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6·25전쟁 초기 1년을 이렇게 투지와 사명감으로 겪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