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그리스 신화의 유쾌한 변주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화의 보물창고다. 문학, 미술, 영화 등 그리스 신화와 무관한 장르를 찾기 힘들다. 아무리 꺼내어 써도 마르지 않는 상상력의 샘이다.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인용돼 "또 그 얘기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뭔가 기발한 게 없으면, 상투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위험성도 크다.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감독 크리스 콜럼버스)도 그리스 신화가 뿌리다. 그냥 빌려온 정도가 아니다. 아예 대놓고 그리스 신화를 끌어들인다. 너무 뻔뻔하고 당당해서 차라리 귀엽다. 안 그런 척하며 베끼는 것보다 정직한 전략이다.

설정부터 익숙하다. 인물들의 이름이 그리스 신 그대로다. 제우스(숀 빈), 포세이돈(케빈 매키드), 하데스(스티브 쿠건) 등이다. 그리스 신들이 전부 할리우드로 이사한 듯하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최대 무기인 번개를 잃어버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수백 명의 아이들(데미 갓)이 캠프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올림푸스 신전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있다는 발상들이 흥미롭다.

주인공인 17세 소년 퍼시 잭슨(로건 레먼)은 데미 갓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느 날 그에게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제우스가 번개를 도둑맞았는데, 그 번개를 찾아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제우스가 퍼시를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퍼시는 엄마를 지옥에서 구출하려면, 신들의 전쟁을 막으려면, 번개를 찾아 제우스에게 돌려줘야 한다.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과제다. 퍼시는 친구인 켄타우로스 그로버(브랜든 T. 잭슨), 여신 아테나의 딸 아나베스(알렉산드라 다다리오)와 함께 모험을 떠난다.

퍼시는 슈퍼히어로다. '퍼시 잭슨…'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 어드벤처다. 결말은 사실 뻔하다. 퍼시가 우여곡절 끝에 번개를 찾고, 범인을 색출해 물리치고, 인류를 재앙에서 구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퍼시의 모험 과정을 얼마나 새롭게,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이느냐가 관건이다.

퍼시의 캐릭터는 익숙하다. 판타지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해리와 닮았다. 처음엔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라는 걸 모른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숨겨진 능력을 깨닫는다. 신출내기 해리가 쿼디치 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듯, 퍼시도 데미 갓의 군사캠프에 입소하자마자 특급 전사로 거듭난다. 모두 한 감독의 연출작이니 동어반복인 셈이다.

하지만 퍼시의 영웅담은 꽤 볼 만하다. 고난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다채롭다. 퍼시 일행은 지방에서 가구를 파는 메두사(우마 서먼), 박물관에 숨어 사는 히드라를 함께 물리친다. 향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는 연꽃 과자를 먹고 최면에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간에 포기하면 영웅이 아니다. 퍼시는 온갖 시련을 뚫고 과제를 완성한다.

영화의 짜임새는 사실 허술하다. 행동의 논리성이나 인물의 심리 묘사 등은 찾기 힘들다. 창의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업다. 그리스 신화의 서사를 그대로 베낀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다. 퍼시가 왜 하데스에게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해명해야 하는지 등이 불분명하다. 번개를 훔친 자의 야망과 설명도 다소 엉뚱하다. 게다가 전개 과정은 슈퍼히어로의 액션 어드벤처 영화라는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단점을 가려주는 것은, 순간순간의 재치와 상상력이다. 자신의 눈을 보는 자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돌로 변하고, 퍼시의 양아버지가 경고를 무시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돌이 되는 후일담은 웃음을 자아낸다. 가볍고 현대적인 설정으로 신화의 숨은 의미를 쉽게 설명해준다.

'퍼시 잭슨…'의 타깃은 명확하다. 그리스 신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몰라도 관계없는 어린이들이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액션을 배치하고,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리 포터…' 시리즈만큼 신선하지는 않지만, 가족들이 오락영화로 즐길 만한 영화다. 진지하고, 새롭고, 의미있는 메시지를 원하는 관객들에게는 당연히 지루할 것이다.

< 기획취재팀ㆍ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