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셋 기르고 있는 덕분인지,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딸들 때문에 집 안이 온통 난리가 납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인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초콜릿렛 원액을 사서 끓이고 녹여서 각종 모양의 초콜릿을 만든 다음 예쁘게 포장하는 딸들의 정성 때문에 집안이 온통 초콜릿 천지가 되고 맙니다.

설 명절이었던 14일 발렌타이데이 밤 1시쯤 동대문에서 20대 초반의 청년을 태우고 서울 천호동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청년이 차에서 내리려고 합니다.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왜 내리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청년이 머뭇거리는 말투로 “택시비가 모자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여기까지 나온 요금만 받을테니 목적지까지 타고 가라"고 하고 1200원 요금만큼 거리를 더 가서 청년을 내려줬습니다.

이 청년이 고마웠는지 손에 들고있던 무언가를 저에게 주는데 잘 살펴보니 큼직한 초콜릿이었습니다. 청년은 “여자 친구한테 받은 것인데 고마워서 저에게 나눠 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초콜릿을 청년과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국적불명의 날 덕분에 비싼 초콜릿을 접할 기회가 생겨서 좋기는 합니다만, 연인들께서는 밤늦게 헤어지는 연인이 택시비는 충분히 있는지 확인하시면 자신이 기껏 마음을 담아 선물한 초콜릿을 택시운전사와 나눠 먹게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늦은 밤 택시비가 모자랄 경우가 가끔 있을 것입니다. 위의 청년처럼 딱 가진 돈 만큼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내리겠다고 하는 것이 사는 도리이기도 하겠으나, 이왕 이렇게 된 것 승차한 택시기사분께 정중히 부탁을 하면 대부분의 동료들은 흔쾌히 들어줍니다. 야간이라 차가 소통이 잘 될 때는 2000~3000원 정도의 거리도 금방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과히 즐거운 마음이 안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술 냄새가 엄청 나면서, 지금 술집에서 몇 차 까지 마셨다 자랑하면서, 오늘 술값이 얼마 나왔네 하면서 택시비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할 적에는 택시비가 모자란 것이 아니고 사람이 좀 모자라 보이기도 합니다.

한 손님은 “술값이 몇십, 몇백만원 나왔네”하다가도 택시요금이 1만200원 나오자, “아저씨, 만원권 두 장밖에 없는데…”라고 하기도 합니다. 상황에 따라 이해하기는 합니다만, 술값은 아낌없이 쓴다고 자랑하고서 택시요금 몇백원은 깎으려고 드는 모습이 얄밉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다음달 3월 14일은 또 화이트데이 머시기 날입니다. 그 날도 택시비가 모자란, 초콜릿 선물을 받은 여성분이 택시를 타길 기다리며….

◆이선주는 누구?

이선주(47)씨는 23년 경력의 택시기사다. 2008년 5월부터 차 안에 소형 카메라와 무선 인터넷 장비를 설치해 택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동영상 사이트인 ‘아프리카(afreeca.com/eqtaxi)’에 ‘감성택시’란 이름으로 실시간 생방송하고 있다. 택시 뒷좌석에는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카피씨(Car-PC)를 설치해 무료로 승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일보를 비롯해 미 ABC 방송, YTN, SBS 등에 소개된 바 있다. 1999년에는 교통체계에 대한 정책제안 등의 공로로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조선닷컴에서 ‘eqtaxi’라는 아이디로 활동하고 있다. ‘만만한게 택시운전이라고요?(1998)’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배꼽잡고(1999)’ 등 두 권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