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둥~'. 광장 전체에 북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행진이 시작됐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를 검은색 깃털로 장식하고 은색(銀色)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공작 부인 뒤에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로 분장한 여성이 지나갔다.
곱슬곱슬한 은색 가발을 쓴 그는 엉덩이 부분을 크게 부풀린 선명한 주홍색 드레스 치맛자락을 끌며 등장했다. 그 뒤엔 가면과 의상을 전부 금빛으로 통일한 베니스 상인이 자기가 등장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장(假裝)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사방에선 관광객들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 질러대는 감탄사,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더 좋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옆 사람과 몸싸움을 해대고 건물 기둥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열정은 특종 경쟁에 몸이 달아 있는 사진기자들의 취재 열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 관광객들 역시 가장무도회에라도 가는 길인 양 저마다 형형색색 가면과 가발로 한껏 치장하고 있었다. 7일 정오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마르코(San Marco) 광장에서 연출된 모습이었다.
해마다 2월이면 베니스에선 10일 동안 '카니발레(Carnivale)', 즉 가면 축제가 열린다. 과거 베니스 귀족들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몰래 무도회에 참석하거나 연애 행각을 벌인 데서 유래한 행사다.
이때는 베니스 전체가 흥겨운 음악 소리로 뒤덮인다. 우스꽝스러운 궁중 광대 모자를 쓴 버버리 코트 차림의 노신사나 전위적인 유령 가면을 쓰고 아기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가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오히려 이때만큼은 민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다. 올해 축제는 6일부터 16일까지다. 축제는 6일 저녁 9시 무렵 산 마르코 광장에서 열린 선포식과 함께 시작됐다.
이 축제 선포를 위해 광장엔 두 개의 대형 전광판과 무대가 특별히 설치됐다. 9시를 넘기자 사회자가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고 이탈리아어로 인사말을 시작했을 때 광장은 수만 명의 관광객이 질러대는 환호로 뒤덮였다.
축제를 공식적으로 알린 건 6일 저녁 선포식이었지만 전부터 베니스는 이미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도시 곳곳엔 오전부터 가장무도회에 어울리는 화장을 해주는 간이 화장대가 마련됐다.
얼굴 전체에 파랗고 빨간 색조 화장과 반짝거리는 작은 별 장식으로 뒤덮는 메이크업을 받는 가격은 7유로(1만2000원 수준)다. 얼굴 반만 메이크업을 받는 데 5유로다. 오후가 되자 행인의 3분의 1이 이렇게 분장을 한 모습이었다.
오전부터 오페라 글라스처럼 눈 부분만 살짝 가리는 가면, 얼굴 반을 가리는 가면,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 광대 모자를 쓴 가면, 턱 부분에 귀부인 레이스를 단 가면을 옮기는 상인들이 베니스 거리를 바삐 오갔다.
가면 좌판대와 골목마다 숨어 있는 가면 가게도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면은 싼 것은 5~6유로지만 금붙이와 보석을 달거나 가죽으로 만든 수공예품은 100~200유로를 훌쩍 넘는다. 1000유로대인 고가품도 있다.
이 기간만큼 참가자들은 '나'가 아닌 '타인'이 되는 자유를 맛본다. 얌전한 중년 아주머니가 노출이 심한 화려한 중세풍 검은 드레스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창녀가 되어 거리를 활보한다.
평범한 직장인이 루이15세나 나폴레옹이 되기도 한다. 조금 전 골목에서 본 평범한 갈색 머리 여학생이 몇 시간 뒤엔 형광 핑크색 파마머리 가발을 쓴 록스타가 돼 레스토랑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이 행사를 위해 오랫동안 의상과 분장을 준비한 듯한 단체 관광객들은 광장 한쪽에서 서로 분장을 고쳐주거나 비뚤어진 의상을 바로 잡아주기도 한다.
중세풍 가면과 가발,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의상에다 부채와 구슬 달린 핸드백, 작은 손수레에 리본을 맨 하얀 강아지를 담아오는 등 소품까지 완벽하게 갖춘 '프로'들이 지나갈 때면 앞다퉈 달려가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베니스 상인이나 화려한 프랑스 귀부인, 궁정 귀족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대세지만 말괄량이 삐삐나 해리 포터 주인공들처럼 남들이 잘 시도하지 않은 복장으로 눈길을 끄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 소녀들이 자주 입는 짤막한 미니스커트 교복 차림에 무릎까지 오는 헐렁한 양말을 신은 백인 남성도 축제기간 동안 산 마르코 광장의 인기인 가운데 하나였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만난 베니스 음악 교사 로베르토는 "여기 온 사람들이 살짝 미치는 모습을 축제기간 내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 그 말대로였다.
어린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하얀 거품이 이는 스프레이를 마구 뿌려대며 장난을 치고 젊은이들은 밤늦게까지 거리를 활보하며 포도주를 병째 마셔댄다. 광장뿐 아니라 좁고 구불구불한 베니스의 골목 어디든 사람들의 웃음 소리, 아마추어 악단의 흥겨운 음악 및 광대 가면에 달린 방울 소리, 축제 때 자주 쓰는 작은 색종이 조각들이 점령하지 않는 곳이 없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베니스는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햇살이 비칠 때면 겨울에도 초여름처럼 날씨가 사랑스럽고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강 위로 곤돌라가 지나가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옛날 풍경화가 된다.
아직도 이곳 주요 교통 수단은 물 위를 오가는 수상버스인데다 택시를 부르면 '워터 택시(Water Taxi)'라고 불리는 객실이 딸린 작은 배 한 척이 도착한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고풍스러운 평상시의 베니스와 시대를 초월한 현란한 가면과 번잡함이 도시를 점령하는 축제기간의 베니스는 가면을 쓴 얼굴과 민얼굴의 차이만큼 크지만 둘 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