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T―뉴스 이인경 기자] 2010년, 청순글래머 열풍의 핵이 신세경이라면 1980년대 청순글래머의 대명사는 이보희가 아닐까? 1980년대 '어우동'과 '공포의 외인구단'의 엄지로 시대를 풍미했던 이보희는 당시 찾아보기 드문 서구형 미인이었다. 우윳빛깔 피부에 파격적인 연기력까지 겸비해, '원조 청순글래머' 타이틀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1월 28일 개봉한 '식객:김치전쟁'(이하 식객2)은 이보희 연기 인생의 후반전을 끊는 작품. 15년만에 스크린에 컴백한 그는 세월의 흔적이 살짝 엿보이면서도, 차원 다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소속사 마하나인엔터테인먼트에서 여배우로 돌아온 이보희를 만났다.
▶ "이유 없는 특별 출연, 단순한 어머니 캐릭터는 싫어"
갑자기 내린 폭설에 인터뷰 당일, 기자가 30분이나 늦었지만 그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한끼도 못먹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밥 먹을 걸 그랬나? 배가 고프네"하며 웃으며 맞아줬다. 앞에 놓인 초콜릿 쿠키에 매실을 달인 물을 보온병에 담아와 손에 꼭 쥔 모습에서, 시대를 풍미한 톱스타 이전에 인간미가 솔솔 풍겼다. 지난 10여년간 드라마에는 숱하게 보아 왔지만 영화 속에서는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글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달라진 요즘 영화 풍토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라며 입을 뗐다.
"아무래도 여배우, 그것도 내 나이 또래의 배우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다. 특별출연이나 우정출연 제의는 많았지만 감독이나 제작사와 큰 친분도 없는데 잠깐 출연하고 마는 역할은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평범한 엄마 연기를 반복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때를 기다리다 보니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영화하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가득했다."
작년 '식객2'의 시나리오를 받고 그는 모처럼 용기를 냈다. 극중 퓨전 요리사 장은(김정은)의 어머니 수향 역을 맡아 한국 전통 어머니상을 연기하게 된 것. 수향은 재개발 공사로 인해 문닫을 위기에 처한 한식집 춘양각을 지키려 하지만, 딸 장은의 반대에 부딪힌다. 묵묵히 뒤에서 딸을 지켜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이 종반부 진한 감동을 준다.
"사실 '식객' 1탄은 못 봤다. '식객2'를 택한 이유는 전작의 성공과 관계없이, 어머니의 역할이 전체적으로 큰 축을 형성하면서도 공감을 살 만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자기 주장 강한 자식의 길을 묵묵히 따라주곤 하지 않았나? 요즘 같은 시대에 드문 어머니의 모습이라 그립고, 좋았다."
고운 한복에 머리를 쪽진 모습이 여전히 아름다웠다고 하자, "너무 젊어보여서 엄마 분위기가 물씬 안나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다"며 웃었다.
"다행히 감독이 수향이는 젊은 시절의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라고 하더라. 극중 입고나오는 한복들은 일부러 과거 작품 활동 때 인연을 맺었던 단골 집에서 맞춘 것들이다. 이보희 만의 분위기를 만들려했다."
촬영 현장 역시, 80년대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스케줄을 짜서 정해진 신만 찍는 현장 분위기에 놀랐다. 음식 영화라 그런지, 먹을 것은 원없이 먹었다. 우리 작품에 나오는 음식들은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정성 들여 만든 것들이었다. 나중에 다들 싸가려고 난리였다. 촬영장에서의 3개월, 정말 행복했다."
▶ "드라마 '수삼' 출연, 처음엔 반대 심해"
촬영 막바지, KBS 2TV 주말드라마 '수상한 삼형제' 출연 제안이 와서 영화 제작진들이 그를 말리기도 했다.
"처음 드라마 역할 이름이 '솔이'라고 해서, 참 예쁜 이름이구나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성이 '계'더라. 즉 '개소리'하는 캐릭터란 의미였다. 이를 알고는 감독과 스태프가 '우리 작품 속에서는 자애로운 어머니인데, 드라마에서 180도 다른 어머니로 나오면 관객들이 혼동할까 걱정'이라며 적극 말렸다.(웃음)"
다행히 '식객2'와 '수상한 삼형제' 속 이보희는 극과 극 엄마 캐릭터를 연기해,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했다. 요즘 치솟는 계솔이의 인기를 실감하냐는 질문에 그는 "인터넷을 안해서 잘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친다.
"대신 몸으로 느끼는 변화는 좀 있다. 과거엔 사람들이 '이보희 아니냐'며 쳐다 봤는데, 요즘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일단 날 보면 막 웃는다. 왜 웃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드라마 속 계솔이 캐릭터 때문에 날 웃기게 보는 거였다. 아줌마 파마에 촌티 패션, 막말까지 늘어놓으니 얼마나 배꼽 빠지겠나? 예전 같았으면 속상할 수도 있었는데, 나이 드니까 생각이 바뀌더라. 내 연기로 인해 사람들이 웃고 운다는 사실이 더없이 감사했다. 세월 지날수록 연기에 대한 감사함과 열정은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
성형미인이 득세하는 요즘, 기품있는 그의 미모는 신세대 사이에 나날이 '레전드'로 추앙되고 있다. 20대 못지 않은 몸매와 여전히 깨끗한 피부에 대해 비결을 묻자 이보희는 "관리라는 게 어떻게 없을 수 있겠냐"며 쑥스러워했다.
"우선은 팩을 많이 한다. 쉴 때 집에서 꼭꼭 마스크 팩 등 좋다는 팩은 부지런히 한다. 또 일주일에 한번은 피부과에 가려 하는데 요즘은 시간이 없어서 거의 못간다. 다행히 트러블성 피부는 아니어서,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살고 있다."
'앞으로도 스크린에서 자주 볼 수 있길 바란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물론 나도 바란다"며 웃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최근 인상 깊게 봤다. 또 요즘 배우 중엔 황정민이 눈에 들어오더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봉준호 감독이나, 황정민 같은 실력파 후배들과 한 작품에서 인연을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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