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이 임신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 등 의학적인 사유로 이뤄지는 인공 임신중절(낙태)은 어느 나라나 법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미혼 임신·미성년 임신·출산 환경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낙태를 법으로 인정하는 범위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는 이 부분에 대해 강간·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을 제외하고는 법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에 비해 낙태가 허용되는 범위가 좁은 편이다. 법은 엄격하지만, 실제로 임신이 가능한 여성(15~44세)의 낙태율은 1000명당 31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법 따로 현실 따로인 셈이다.

미국, 낙태 자유화 추세

세계적으로 낙태 허용은 2차대전 이후 인구의 증가와 여성의 인권 신장 분위기 속에서 확대되기 시작됐다. 미국에서 '낙태 자유화' 바람이 분 계기는 1973년 일어난 '로 대(對) 웨이드'(Roe vs. Wade) 사건이었다. 텍사스주에 사는 임신 여성 로가 낙태를 금지하는 주정부 법무장관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다른 주(州)로 '원정 낙태'를 떠나는 비용을 청구한 소송이었다. 결국 법원이 로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여성에게 임신을 종료할 권리가 광범위하게 인정됐다.

이후 형성된 미 연방 대법원 판례는 임신 3개월(12주) 이내의 낙태는 임신부의 독자적인 판단에 속하고, 그 실행은 의사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고 있다. 또 임신 3~6개월 사이는 주정부가 낙태 규제를 할 수 있으며,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 있는 임신 후기에는 낙태를 전면 금지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낙태에 대한 진보와 보수 계열의 의견 차이가 워낙 커서 낙태 병원에 테러가 가해지는 등 미국 사회에서 낙태는 끝없는 논쟁을 낳고 있다. 현재 미국 가임(可妊) 여성의 낙태율은 1000명당 21명으로 한국보다 낮다. 낙태율은 1980년대 초반(29명)을 정점으로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유럽, 임신 초기 낙태 허용

유럽 국가들은 낙태를 여성의 선택으로 보고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영국은 이런 분위기를 이끈 나라다. 1968년부터 임신 24주까지는 포괄적으로 낙태가 가능하도록 했다. 낙태를 중벌로 다스렸던 그전 150년간의 관행을 거둔 것이다. 낙태 시술은 의사 2명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의사는 양심에 따라 시술을 거부할 수 있다. 현재 임신 중절의 88%는 임신 13주 이내에서 이뤄지고 있다.

다른 유럽 국가는 임신 주수(週數)에 따라 낙태 허용 범위를 달리하고 있다. 스위스는 임신 10주까지 여성의 선택에 따라 임신을 종결할 수 있다. 독일·덴마크·이탈리아·스페인·룩셈부르크 등은 임신 12주까지 허용한다. 반면 아일랜드는 임신부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한 낙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일본, 2차대전 후 낙태 허용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948년부터 비교적 일찍 낙태를 허용했다. 2차대전 이후 인구 팽창이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사회 분위기와 윤회(輪廻)를 믿는 전통적인 불교 사상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이로써 의학적인 이유 외에 ▲미혼 상태의 임신 ▲불륜 상황에서의 임신 ▲이미 많은 자녀를 출산한 경우 ▲출산으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는 등 경제적인 상황이 악화될 염려가 있을 때 등도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중국싱가포르도 임신부의 요청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한 낙태를 인정하고 있다. 대만은 임신 24주까지 포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남미, 낙태 철저히 제한

가톨릭을 국교(國敎)로 삼고 있는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은 낙태를 엄격히 제한하는 편이다.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페루·칠레 등은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낙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임신부의 건강이 위태로운 경우만 허용한다.

지난 2001년 낙태 인정 범위를 일부 확대하는 의사윤리지침 제정을 주도한 서울대 의대 이윤성(법의학교실) 교수는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낙태 관련 법은 엄격한 반면 낙태에 대한 사회적 통념은 너무나 관대했다"며 "이 간극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