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둥성 출신인 웡푼(黃寬·1829~1878)은 1857년 당시 세계 최고의 의학교육을 자랑하던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병리학과 해부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귀국한 웡푼은 홍콩과 광저우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했다. 웡푼은 서양의학을 전공한 유일한 중국인 의사였지만 서양 선교사들은 그의 자격을 끊임없이 의심했다. 자신들과 동등한 수준으로의 월급 인상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고, 병원 내 중국인 직원문제를 해결하는 데 갈등을 빚었다. 결국 웡푼은 1860년 런던선교회에 사직을 신청하는 편지를 썼다. 광저우의 런던선교회 병원은 '웡 박사의 자리에 영국인 그리스도교도 신사'를 보내 줄 것을 선교회 본부에 요구했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와 박형우·박윤재 연세대 교수가 각각 쓴 두 권의 책은 동아시아에서 서양의학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의사들이 직업적 전문인으로 자리를 잡아가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미시사…》는 역사학계에서 유행하는 미시사·생활사의 흐름을 이어받아 동아시아의 대표적 근대 직업인인 의사들의 생애를 검토한다. 동아시아에서 근대문명을 대표하는 서양의학을 받아들인 1세대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20세기 전반 서양의학에 관해 최소한 83종의 출판물을 번역·소개한 중국의 딩푸바오(丁福保)는 정작 1915년 중화의학회가 설립됐을 때는 의학 학위가 없어서 정식 회원이 되지 못했다. 1917년 베이징여자협화의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여의사 마리온양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다산(多産)을 장려한 마오쩌둥의 뜻을 거슬러 '반(反)혁명 우파분자'로 숙청됐다. 메이지 일왕의 주치의였던 이케다 겐사이(池田謙齋)는 메이지 일왕이 서양의학을 불신한 탓에 신체 검진도 거부당했고, 처방도 받아들이지 않아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대만 최초의 산부인과 개업의 가오징위안(高敬遠)은 '진찰받으러 병원에 들어 왔지만, 진찰대에 오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여 결국 진찰도 받지 않고 돌아간' 여성 환자 때문에 고전을 치러야 했다.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은 해부학자 박형우, 역사학자 박윤재 교수가 1885년 알렌의 제중원 설립을 시작으로 서양의학이 한국에서 자리잡는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1886년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제중원 의학교가 문을 열었고, 1899년 학부(學部) 소속으로 3년제 의학교를 개설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 면허인 '의술(醫術) 개업 인허장'이 수여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08년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는 의료 선교사 에비슨이 지도한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 7명이다. 이들 중 6명은 모교에 남아 후배 교육과 강의를 맡았는데, 1910년 경술국치 후 대부분 독립운동에 나서 나라를 구하는 '대의'(大醫)가 됐다. 김필순이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고, 드라마 '제중원'의 실제 주인공인 박서양은 연변으로 망명해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7명의 졸업생 중 김필순·박서양·주현측·신창희 등 4명이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세브란스 의전의 초기 해부학 강의와 수술 장면 등 책에 실린 사진들을 넘겨보기만 해도 눈길이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