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만화를 보고 모두가 즐거워지기를 바랐습니다.”(2002년 12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국 명랑만화의 뿌리이자 평생을 명랑만화 작가로 살았던 ‘꺼벙이’와 ‘순악질 여사’의 원로만화가 길창덕(吉昌悳) 화백이 지난달 30일 오후 1시쯤 노환으로 숨졌다. 항년 81세.
1930년 1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웃음을 선물한 한국 명랑만화의 개척자였다. ‘허서방’(1955) ‘홀쭉이와 뚱뚱이’(1959) ‘꼴뚜기 영감’(1960) ‘재동이’(1966) ‘꺼벙이’(1970) ‘순악질 여사’(1970) 등 고유의 캐릭터와 작품을 통해 전후(戰後) 다양한 세대를 가로지르며 웃음과 희망을 줬다. 그의 후배이자 제자인 ‘로봇찌빠’의 신문수(71) 화백은 “신문 시사만화나 만화체 그림만 있던 시절에, ‘명랑만화’라는 장르를 개척해서 반석에 올려놓은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맹꽁이 서당’의 윤승운(67), ‘별똥 탐험대’의 박수동(69), ‘철인 캉타우’의 이정문(69) 등의 작가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잠시 신문 시사만화를 그린 적도 있었지만 “내 만화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을 못 보겠다”는 이유로 곧 명랑만화로 ‘복귀’했다. 공식적인 데뷔는 1955년 잡지 ‘야담과 실화’에 ‘허서방’을 연재하면서부터였지만, 실제로 그가 만화가로 인정받은 것은 열네 살 때다. 평양과 묘향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평안북도 정주 조일보통학교 고등과 2학년생들은 기행문을 써내라는 지시를 받았고, ‘소년 길창덕’은 엉뚱하게도 그 숙제를 파노라마 만화 형식으로 제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를 냈던 선생님은 작품을 보고 나서 감탄사를 연발했고, 이후 그를 ‘만화가’로 공식 인정했다. 그의 캐릭터들은 얼핏 단순한 선(線)으로 대강 그린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정제된 소박함과 명쾌함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 땜통자국 머리에 콧물을 흘리던 ‘꺼벙이’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국민 남동생’이었고, 일자 눈썹의 순악질 여사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대한민국 아줌마’였다. 캐나다 토론토에 체류 중인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60) 화백은 전화통화에서 “데뷔했을 때나 은퇴하셨을 때나 선(線)과 캐릭터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선생님의 그림은 여전히 촌스럽지 않고 세련미가 있다”면서 “50년 전 작품이면 ‘클래식’인데, 여전히 당대(當代)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존경스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폐암진단과 수술을 받은 뒤 1997년 12월 이후 모든 연재를 중단했다. 한국 만화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2년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받았고, 2003년 보관문화훈장, 200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어워드대상을 받았다. 신문수씨는 “지난 설날 윤승운·이정문·박수동·이두호 작가 등과 세배를 갔더니 ‘꺼벙이’ ‘순악질 여사’등 직접 그린 그림과 글씨를 선물로 주셨다”며 “올해 설에도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수정씨는 ‘아기공룡 둘리’의 탄생도 사실 길 화백 덕분이라고 했다. 1970년대 최고의 만화잡지 중 하나였던 ‘보물섬’에서 ‘아기공룡 둘리’의 연재가 시작됐는데, 그게 길창덕 화백의 ‘대타’였다는 것. 그는 “제가 초창기 길창덕 선생님 만화나 일본만화를 표절했다는 오해를 받을 때도, 이 그림은 ‘내 선이 아니고 자네 선이야’라고 공식 인정해 주신 분이 선생님”이라면서 “한국만화의 거대한 뿌리가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유족으로는 딸 영주·혜연·혜경씨와 둘째 사위 최준호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장 등이 있다. 빈소는 평촌 한림대 성심병원 장례식장 특 1호실. 발인은 1일 오전 8시. 장지는 대전 현충원. (031)384-4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