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2시,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에 있는 '단천식당' 앞으로 30여 명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점심때를 훌쩍 넘겼지만 가게 안의 70여 개의 테이블은 꽉 들어차 있었다. 오징어순대, 가자미회냉면 등 이북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주변에 더 있지만,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은 이곳 뿐이다. 찬 바닷바람이 온몸을 스쳐도 사람들은 요지부동, 발걸음을 옮길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미닫이 철문을 열고 부른 배를 두들기며 걸어 나오는 손님들의 얼굴엔 화색이 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손님행렬에 식당 종업원들은 정신없이 행주로 탁자들을 훔친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이 식당은 이미 속초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식당 입구에는 이곳을 찾은 새 박사 윤무부교수, KBS 대하사극 '용의 눈물' 김재형 PD, 개그맨 김용만 등 유명 인사 사진들이 여기 저기 붙어있다.
◆단천식당 음식 비결은 '고향의 맛'
이 식당 주인 윤복자(71) 씨는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직접 주방 곳곳을 누비며 음식준비에 팔을 걷어붙인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손님을 보면 피곤함이 싹 가셔. 우리 집은 단골손님이 많은데 서울에서도 오고 미국에서도 오고 그래."
연신 손님 얘기를 늘어놓는 그에게 맛의 특별한 비법이 뭐냐고 묻자 그는 "비법이랄 게 뭐 있어 할머니 손맛이 좋아서 그렇지"라며 그냥 웃고 말았다.
"내 고향 (함경남도) 단천에서는 큰일이 있을 때마다 돼지를 잡았어. 살점을 다 발라먹고 나면 그 내장에다가 순대를 해 먹었지, 돼지 대창에다가 찹쌀, 머리고기, 선지를 버무려서 속을 해 넣고 솥에다 푹 찌면 얼마나 맛이 좋았다고. 아바이순대가 바로 딱 그 맛이야. 우리네 먹던 음식 맛을 그대로 내는 게 가장 중요해."
아바이순대, 순대국밥, 편육 등 여러 메뉴 중에서도 가자미 회냉면과 오징어순대는 단천식당의 대표메뉴다. 오징어순대는 그 특유의 고소함과 담백함이 일품이다. 오징어 속에다 찹쌀과 다진 고기, 야채, 완두콩 당근 등을 넣어 찐 후 다시 계란 옷을 입혀 튀겨낸다. 가자미 회냉면은 고구마 전분으로 뽑아낸 쫄깃한 면발에 꼬들꼬들하게 말린 가자미회를 올려 맛은 물론 식감까지 뛰어나다.
단천식당이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KBS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 때부터다. 드라마의 배경이 된 청호동은 금세 관광명소가 됐고 점차 관광객들의 입소문이 나면서 이른바 '대박'집이 된 것이다. 윤씨는 "이 자리에서 가게를 시작한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며 "이북 음식에 대한 향수(鄕愁)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말했다.
◆6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리운 고향집
윤씨는 실향민이다. 열세 살 때 함경북도 단천에서 작은아버지를 따라 월남했다.
“벌써 60년이 다 돼가는 얘기지, 6·25 전쟁이 터지니까 우리 오마니가 ‘너라도 가서 잘 살라’고 작은아버지 손에 날 딸려 보냈어. 어린 것이 전쟁이 뭔지나 알겠어. 어디 좋은데 구경시켜 줄려나 보다 그랬지.”
전쟁의 뜻도 모르던 13살 소녀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건만 남북을 가로막는 휴전선의 굳건함은 변함이 없다. 고향으로 되돌아갈 길은 막막했고 어린 윤씨는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야 했다.
첫 정착지인 강원도 주문진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찐빵장사를 시작했다. 무거운 찐빵을 머리에 이고 시장통을 돌면서도 이북에 있는 부모님 만날 날을 기다렸다. 찐빵 장사에 이골이 나자 이번에는 나무 땔감을 떼다 팔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것이 어떻게 그렇게 억척스러웠나 몰라. 그래도 난 장사일이 참 재미있었어 . 천성은 속일 수가 없더라고.”
어린 소녀가 처녀로 성장했던 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계속 자랐다. 이제나 저제나 통일될 날만을 손꼽았던 그는 조금이라도 고향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거처를 속초 청호동으로 옮겼다.
아바이마을로 더 잘 알려진 청호동은 1·4 후퇴 당시 국군을 따라 남하한 함경도 일대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에 불과했다. 청초호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긴 모래밭에 판잣집을 세웠고 미군부대서 나온 기름종이를 덧씌워 빗물을 막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19살, 과년(瓜年)한 윤씨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남편은 윤씨와 같은 단천사람으로 32세의 노총각이었다. 남편이 바다에 나가 오징어를 잡는 동안 윤씨는 지금의 단천식당 자리에서 사발 그릇을 팔았다.
"요강 팔아서 뭐 남는 게 있어야지. 그렇게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긴 어렵겠더라고. 그러다 한번은 방파제 앞에서 감자 부침개를 부쳐 팔았는데 하루 벌이가 꽤 괜찮았어. 그 길로 그릇가게 정리하고 순대국밥 장사를 시작했지.”
1970년대 초 개업한 단천식당은 순대국밥 장사를 시작으로 자장면을 거쳐 냉면집으로 거듭났다. 리어카 한가득 순대국밥을 배달하던 남편은 고인이 된 지 오래다. 금수강산이 4번이나 바뀌었지만 윤씨의 일상은 여전하다.
“새벽 6시만 되면 누가 날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아, 주섬주섬 일어나서 냉면 육수에 불 피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지 뭐. 오늘은 김치를 200포기나 담가야 돼. 많은 것 같아도 그게 딱 일주일 먹을 것밖에 안 돼.”
바쁘다며 구부정한 허리를 일으키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아직도 고향생각이 나느냐고 물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가 아직도 눈에 훤해. 동무들이랑 뛰어놀던 마당이며 들판에 곡식 자라던 모습까지 생생한데. 우리 아바이 오마니는 벌써 돌아가셨겠지? 다섯 살, 여덟 살 내 동생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