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교육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제자들을 위해 모든 힘을 쏟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잘 가르치기 위해 교단에서 열정을 쏟는 열혈 교사들의 이야기를 '맹렬 교사 열전(列傳)'이란 시리즈로 연중 소개합니다. 주변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교사, 훌륭한 교사들의 이야기를 제보(이메일 school@chosun.com)해 주십시오.

"요약하라는 문제 처음 보면 무엇부터 찾으라고 했어요? 그렇지, 핵심 개념어 찾고, 다음엔 개념과 연관된 주장을 적으라고 했죠?"

23일 오전 서울 동작구 대방중학교 3층 교실. 방학 중인데도 졸업을 앞둔 중3 학생들이 나와, 논술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이 학교로부터 150m쯤 떨어진 수도여고 현인철(49·윤리) 교사였다. 대방중 3학년생 부모들이 겨울방학 프로그램으로 고등학생 수준의 논술 강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자, 신원재 교장이 이웃 수도여고에 직접 찾아가 현 교사를 섭외했다.

신 교장은 "학부모들이 소문을 듣고 '현인철 선생님을 초빙해 달라'고 꼭 집어 부탁했다"며 "방학 보충수업이 시작된 지 3주가 지났는데, 이 수업만 출석률 100%"라고 했다.

현 교사는 논술 관련 서적을 16권이나 출판한 '스타 교사'다. 그는 겨울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금천구청의 요청으로 2주간 매일 금천구 4개 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했고, 작년에는 경남 김해외고에 초청받아 1학기 넘게 특강을 했다.

교사 대상 연수에도 단골 강사이고, 학원가에서도 'A급 교사'라고 평가받는 그는 20여년 전부터 전교조 활동을 해온 '골수 조합원'이기도 하다.

서울 신대방동 수도여고 교무실에서 현인철 교사가 제자들에게 논술 지도를 하고 있다. 그는“‘경쟁 교육’에는 반대하지만 수업만큼은‘최고’가 되려는 게 전교조 교사들”이라고 말했다.

◆학원 이기겠다며 논술연구 시작

1985년 교사 생활을 시작한 현 교사는 1989년 전교조 출범 때부터 전교조 교사였다. 단순 가입만 한 게 아니라, 전교조 '강성 지역'으로 분류되는 동작·관악지역의 지회장·분회장을 역임한 '현장 활동가'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논술 강의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2005년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수능시험이 끝나자 아이들이 죄다 논술학원에 가더라고요. 물어봤더니 학원비가 2~3주에 100만~200만원이나 한대요. 제대로 가르치는지 검증할 길도 없는데, 아이들이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도 학원 말고는 대안이 없어서 다닌다는 겁니다."

충격을 받은 현 교사는 "교사들이 보고만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현 교사는 그해 겨울방학 내내 논술 연구에만 매달렸다. 각 대학 논술 기출문제를 죄다 뽑아 경향을 연구하고, 지인을 통해 학원 교재를 구해 보기도 했다.

이듬해 1학기가 개학하자 현 교사는 겨울방학 동안 만든 교재를 학교 인쇄실에서 복사하고 끈으로 묶은 뒤 논술고사 보는 대학에 지원하려는 고3 제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고2 윤리수업 시간도 '논술형'으로 바뀌었다. 현 교사는 윤리수업 중간에 3주에 한 번꼴로 진도에 맞춰 '논리적인 글쓰기'를 가르쳤고, 학생들에게 3주마다 논술문 작성 숙제를 내주었다. 처음에는 일부 학생들이 "국·영·수만 해도 바쁜데 웬 논술이냐"고 했지만, 이듬해 입시에서 논술로 효과를 본 뒤엔 오히려 "감사하다"며 찾아왔다.

지난해 현 교사가 온라인 수업 게시판에 올려놓은 첨삭지도글은 1400여개에 달한다. 학생들이 제출한 글 4000여편을 일일이 읽어보고, 그중 본보기가 되거나 흔한 실수를 알려줄 수 있는 글을 뽑아 올린 것이다.

현 교사는 "논술을 가르치면서 일은 배로 늘어났지만, 아이들의 사고와 글이 발전하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며 "논술 강의를 통해 윤리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도도 높아졌다"고 했다.

"아이들 잘 가르치는 게 참교육"

전교조는 공식적으로 '입시교육 반대'를 외쳐왔다. 전교조 소속 교사가 대학입시와 직결된 논술 강의를, 그것도 정규 수업 시간에 하는 것이 문제 되진 않을까.

현 교사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나는 논술 수업을 시작한 이후에도 전교조 활동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고,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제대로 잘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전교조가 주장해온 '참교육'의 기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논술 교육이야말로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요구하면서, 사전지식·선행학습·줄세우기와는 상관없는 바람직한 인성(人性) 교육"이라며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보편화된 전인적 입시제도"라고 주장했다.

현 교사는 자신이 강사로 참가했던 각 지역 교육청 교사 연수에 가보면 전교조 교사들 중에 각 학교의 '논술 달인'이 많다고 주장했다. 현 교사는 "전교조가 출발부터 싸움을 많이 하다 보니 '투쟁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조합원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교재 연구나 수업 준비 많이 하는 성실한 교사가 수두룩하다"고 했다.

현 교사는 교재 연구를 위해서도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2009 한국외대 수시2학기) 등 탈근대 철학 관련 제시문이 최근 대학 논술시험에서 많이 출제되자, 그는 사비(私費)로 관련 도서를 100여만원어치를 사서 연구를 벌이기도 했다. 국내 번역되지 않는 영어본도 적지 않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면 박사는 못 되어도 (출제) 교수들의 지적(知的) 유행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교사도 전문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