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정문(李政文·69)을 만난 곳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였다. 센터 앞엔 '통감부터(統監府址)'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1906년에 들어선 통감부가 1910년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1926년까지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곳에선 토종 로봇만화를 재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징가 제트(Z)와 아톰 등 일본만화가 안방극장을 휩쓸던 30여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일본로봇을 때려부순 토종로봇 '철인 캉타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정문은 1941년 일본 고베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양화점을 해 집안 형편은 좋은 편이었다. 가족은 1944년 귀국해 효자동에 둥지를 텄다. 이정문이 취학 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쪽발이'였다.

우리말 발음이 서툴러 붙은 별명이다. '왕따' 위기를 구한 건 집 안의 영사기였다. 아버지는 일본 전래동화를 만화영화로 만든 '모모타로(桃太郞)'를 아들의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일본 만화 덕을 본 셈이다.

이정문은 글을 깨치자마자 우리 작가들의 만화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고우영의 형 고일영과 고상영 작품을 비롯, 김용환·김의환 형제의 만화였다. 그는 "만화가에겐 뭔가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 운명이 바뀐 건 6·25 때였다. 예전에 하던 양화점을 정리하러 일본으로 떠났던 아버지가 전쟁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가족의 생계는 순식간에 곤궁해졌다.

영사기에 재봉틀까지 팔고 급기야 옷가지까지 내다놨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생계가 다시 급해졌다. 누군가는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장남인 형이 공부를 계속하는 대신 차남 이정문은 학업을 접기로 결론을 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형과 두 동생을 책임지는 12세 소년가장은 통의동 시장 한켠에서 구두를 닦았다. 신문을 팔러 다녔고 석간신문도 돌렸다. 이렇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손에는 봉지쌀이 들려져 있었다.

당시 그에게 힘들었던 두 가지가 있다. 새벽에 구두 닦으러 집을 나서다 등교하는 형과 마주칠 때, 어쩔 줄 몰라하는 형의 기색이었다. 구두 닦을 때 어른들에게 당하는 구박도 심했다.

그는 앙갚음하는 상상을 했다. 훗날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심술 캐릭터가 그때 탄생했다. "놀부에서 심술 주인공들 모티브를 따왔어요. 강한 자에 강하되 약한 자들의 설움을 갚아주는 심술쟁이들이죠."

열다섯 살이 돼 구두닦이 생활을 청산하고 문구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오전 6시 출근해 자정에 퇴근하는 일과가 1년에 추석과 설날 이틀을 제외하고 계속됐다. 그래도 만화를 그릴 수 있어 행복했다.

근무 중 아이디어를 퇴근 후 만화로 옮기다 보면 새벽 2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그는 "만화는 고된 삶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었다"고 했다. 문구 납품업체에 스카우트되면서 학업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잡았다.

야간학교를 다녀 중학 과정을 마쳤다. 1959년은 이정문에게 특별한 해이다. 열여덟에 중3 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잡지 '아리랑'의 신인만화가 공모전에 지원, 가작 입선하면서 직업 만화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주경야독해 서라벌고교에 간 뒤 고3 때인 1960년 일본에 있던 아버지가 귀국하면서 경희대 상학과에 입학했다. 데뷔작 '심술첨지'등이 전매특허 같지만 이정문이 가장 애정을 쏟은 작품은 1976년에 탄생한 '철인 캉타우'다.

백만년 전 지구에 온 두 외계 종족들이 서로 지구를 차지하려 다투다 빙하기가 몰려와 동면(冬眠)에 빠졌다가, 우연한 계기로 최근에 다시 깨어나 지구 쟁탈전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이정문은 캉타우를 그리면서 너무 많은 열정을 쏟은 탓에 이후 공상과학(SF) 만화에는 손을 떼다시피했다. 그는 Why?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병합 100년째를 맞은 올해 캉타우 2탄을 선보이는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캉타우가 무슨 뜻인가요?

"우리말 '깡다구'에서 따 왔어요. 속어지만 '악착같이 버티다' '억지스럽게 밀고 나가는 오기'라는 뜻이 맘에 들었거든요."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계기는 뭡니까.

"결혼 5년째인 1973년에 큰딸이 태어났는데 당시 TV에 우주소년 아톰이 방영되고 있었어요. 이어 마징가 제트가 나왔는데 골목마다 만화 주제가가 퍼질 정도였어요. 속상했어요. 아이들이 일본만화인 줄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했나요?

"아이들이 열광하는 로봇만화를 우리 손으로 그릴 수 없었을까 하는 마음이었죠. 나라도 한번 시도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캉타우가 일본 로봇과는 모양이 다릅니다.

"배불뚝이 비만형에 온몸에 표창이 꽂혀 있습니다. 오른손과 달리 왼손에는 철퇴가 달린 비대칭이고 가슴은 벌집모양이지요.".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나요.

"몸매가 잘빠진 일본 로봇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런 모양새가 나온 것 같아요. 캉타우 몸통 형태는 약국에서 파는 마이신을 힌트로 삼은 거예요."

―스토리와 주인공 성격도 일본 로봇만화와는 달랐겠군요.

"힘 있는 남성과 약한 여성, 선과 악의 뚜렷한 대조 등 일본 로봇만화의 도식을 답습하지 않았죠. 등장인물로 나오는 소녀 경아가 소년 현이보다 더 똑똑한 것도 그렇고 마지막에 악당 스펠타가 자폭하면서 지구를 살리자고 외치는 것도 특이하죠."

캉타우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로봇을 모방하지 않은데다 격투 장면을 표현하려 만화책 양쪽을 쓰는 등 과감한 시도가 많았다. 로봇 대 로봇의 전투, 로봇 여러 대가 동시에 싸우는 장면들은 이전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외계인이 마징가 제트 설계도를 빼앗아 만든 짝퉁 마징가를 캉타우가 쳐부수는 장면도 화제였다. 주인공은 "진짜 마징가였으면 (승패가) 어찌 됐을지 모르겠다"고 했고 적은 "진짜와 붙었다면 5대5의 승부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캉타우 때문에 이정문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이 뒤늦게 제기했던 논란 말이지요.

"심술통 등 제가 그린 캐릭터들과 그림체가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캉타우는 이정문의 문하생이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돌았어요. 황당했죠. 제 딸이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는 거들었다'는 글을 올린 후에야 잠잠해졌어요. 저는 평생 문하생을 둔 적이 없는데 말이 되나요?"

―이후 캉타우로 또 애를 먹었죠.

"캉타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실수한 거죠. 2002년 한 기획사가 찾아와 캉타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캉타우가 부활하겠다 싶어 무조건 사인했죠."

―그런데요?

"뒤늦게 계약서를 살펴보니 캉타우 인형을 비롯해 캐릭터에 관한 모든 사업권을 기획사에 맡기는 것으로 돼 있더군요. 기간도 10년으로 돼 있고, 노예계약과 다름없었어요."

―로보트 태권브이 때문에 자극받아 덜컥 사인한 건 아닌가요?

"로보트 태권브이가 복고(復古) 바람을 타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걸 보고 사실 부러웠어요. 내 분신 같은 캉타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살아 움직이게 된다는 생각에 흥분했던 면도 있어요."

―10년 계약이면 2012년까지인데 그때까진 2탄도 못 내고 만화영화로도 못 만드나요?

"속만 썩이고 있었다 최근 위약금 1500만원 물고 계약 해지했어요. 어찌나 마음이 가볍고 기쁘던지 눈물이 나올 정도였어요."

―캉타우 2부 배경은 뭔가요?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부서진 99대의 캉타우 부품을 악당들이 조립해 되살리게 될 것입니다. 대지진 등 요즘 문제되고 있는 지구 환경에 관한 이슈들을 거의 담을 예정입니다."

―캉타우 설계도까지 이미 만드셨죠?

"10만㎞ 밖 전파를 감정할 수 있는 귀를 비롯, 번개를 모으는 안테나, 블랙박스 등 캉타우 몸체 17곳에 대한 세부 설계를 마쳤습니다. 무게 20t, 높이 20m 등 제원도 구체화했고요."

―앞으로 목표는?

"캉타우는 영화 아바타 못지않은 상품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단기 목표이고, 그걸 3D(차원)화하는 것도 꿈이죠."

이정문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한다. 그가 1965년에 그린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엔 영상 휴대폰을 비롯해 태양열 주택과 전기자동차가 등장하고 최근작 '2041년 생활'에는 상대의 생각을 읽는 휴대폰이나 번개를 전기로 전환하는 기계 같은 아이디어들이 담겨 있다.

―과학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얻나요?

"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죠. 신문도 보고 인터넷 검색도 수시로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