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판결을 내린 판사들 면면을 살피다 '386이 486 됐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40대가 된 과거 386세대 상당수는 대학 때 도서관보다 아스팔트에서 주로 생활했다. 386은 민주·민중·민족·자주·반미(反美)·주사(주체사상)·분배·평등·저항과 같은 단어들과 함께 자랐다. 대학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어도 이런 말만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사람도 있다. 지금 하는 일이 친북(親北)단체 간부이든, 그렇게 욕하던 '매판(買辦)자본'에서 억대 연봉을 받고 있든, 판·검사이든, TV PD이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때마다 광장에 촛불 들고 나온 사람들 중 초·중학생 자녀를 데려온 이들도 대부분 이 세대다. 주변 친구나 선후배들 역시 386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 생각도 바뀐다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남과 다른 생각'이 되기란 쉽지가 않다. 스스로 "나만 세상에 물든 건 아닌가"라며 자아비판의 메스를 대는 사람도 보았다.
여기다 386은 다른 세대와 달리 좌절이란 걸 별로 겪지 않았다. 대학 때는 독재와 싸워 이겼다. 군인들에게 꺾였던 4·19세대, 유신에 막혔던 6·3세대와는 달리 '민족·통일운동'에까지 판을 키웠다. 호황(好況) 덕택에 취직 고민도 적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는 주역이었다. 그런 만큼 자신들 길이 옳다고 믿는 성향도 강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이들이 나라를 움직이는 거냐"는 말까지 나왔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사무관, 배석판사, 말단 검사, 대기업 과장급 정도인 30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막상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들이 주축이었던 정권의 성적표도 별로였다. 선후배들 시선도 따가워졌고, 스스로도 "우리가 아직은 역부족(力不足)"이라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세월이 흘러 386은 이제 모두 486(40대)이 됐다. 직책도 부장판사, 부장검사, 중앙부처 국장급, 대기업 이사, 책임 PD급, 보직교수로 올랐다. 마침내 '세상을 움직일 위치' 언저리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이번에 국회 점거 민노당원과 강기갑 의원에게 무죄를 판결한 판사, '법원 내 주류 교체' 글로 논란이 된 '우리법연구회' 전(前) 회장 부장판사는 63·64·65년생들이다. 모두 나이 먹어 486이 된 한때의 386들이다. PD수첩 무죄 판결 단독판사(70년생)와 용산사건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한 부장판사(59년생) 역시 이웃한 세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이 학교 다닐 때 대단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진보매체 칼럼니스트는 '부장판사 친구'의 말이라며 "운동권이든 아니든 80~90년대에 대학을 다닌 판사들에겐 공감대 비슷한 게 있다. 이번 판결들은 그 결과"라고 전했다. 다르게 말하면 굳이 운동권 출신이 아니어도 그 또래에는 그런 성향이 많고 앞으로도 그런 판결은 계속 나올 것이란 얘기다.
사실 우리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이곳이 아메리카의 53주라도 된다는 것인지" "친일파 독재로 부와 권력을 잡은 이들은 피 묻은 손을…손아귀를 강제로 비틀어…"라고 쓴 글을 보면 20여년 전 대학가 대자보(大字報)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런 운동권 수준의 사고가 통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386세대 모두가 흘러간 운동권 사고로 세상을 살고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 486이 된 이 세대가 우리 사회의 방향을 바꾸거나 최소한 흔들 수는 있는 자리로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입력 2010.01.2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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