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이후 사상사, 특히 유학사(儒學史)를 정리할 때 영남유학은 이황의 퇴계학파, 기호유학은 이이의 율곡학파로 간주했던 것이 학계의 통념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율곡의 아류로 인식되던 우계 성혼을 독자적으로 분리해 윤황 윤선거 윤증으로 이어지는 우계학파의 독자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기호유학의 계통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책은 보다 큰 시야에서 기호유학이란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근기(近畿) 호서(湖西) 호남(湖南)을 포괄하는 기호(畿湖)라는 지역적 개념을 바탕으로 먼저 영남유학과 구별되는 기호유학의 특성을 추출해낸다. 저자에 따르면 영남유학은 퇴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리(理)를 중시하고 윤리적 인간을 추구했다. 반면 기호유학은 서경덕 이이 성혼 등의 영향으로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 실학 의리학 양명학 등으로 다채롭게 전개됐다.

성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저자 역시 기호유학의 큰 맥은 이이로 본다. 그래서 저자는 율곡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짚어내는 데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한편으로는 율곡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개혁의 속도조절을 강조한 시중지도(時中之道)의 묘를 함께 살려야 성공적인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학술적으로 보다 큰 의미를 갖는 부분은 '제3부 기호유학의 심층탐구'다. 그동안 학계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송인수 송기수 민제인 등 조선 초 도학자들이 율곡을 거쳐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등의 사상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추적하고 또 율곡과 사승(師承)관계가 없는 이재의 학문에 주목함으로써 이후 유학이 북학이나 실학에 어떻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지를 사상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다소 전문적이긴 해도 우리 사상에 대한 약간의 소양만 있으면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만큼 평이하게 저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