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고용준 기자] 한 번 즐거운 상상을 해보자. 만약 '택뱅리쌍'으로 불리는 '폭군' 이제동(20, 화승) '혁명가' 김택용(21, SK텔레콤) '사령관' 송병구(22, 삼성전자) '최종병기' 이영호(18, KT) 4명 중 두세 명을 골간으로 하고 '염선생' 염보성(20, MBC게임) '브레인' 김윤환(21, STX) '매시아' 김정우(20, CJ) 등 쟁쟁한 선수들이 가세해 팀을 구성한다면 아마 e스포츠 최고의 팀이 아닐까.

단순히 강자들이 모여서 전력이 강해진 것이 아닌 종족별 대표주자들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모여서 팀 내 경쟁을 유도하는 극강의 전력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면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팀은 과연 프로리그서 몇 연승이나 올릴 수 있을까.

과연 프로리그 최고 기록인 23연승을 깨뜨릴 수 있을지도 관심이 간다. 그러나 연승은 절대로 쉽지 않다. 선수가 강하다고만 해서 되는 일이 절대 아니다. 물론 구성원도 중요하지만 기록을 세우는 데는 선수들을 조율하는 조타수의 역할도 빼 놓을 수 없다.

연승 기록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자면 홍진호 강민 김정민 박정석 조용호 한웅렬 송병석 변길섭 이병민 등 소위 'e스포츠계의 레알 마드리드'라 불렸던 강력한 라인업을 구성하며 23연승 신화를 세운 무적함대 KTF의 선장 정수영 감독이 항상 떠오를 수 밖에 없다. KTF의 23연승 신화는 아직도 깨지지않은 기록 중의 기록.

정수영 전 감독은 1998년부터 프로게임단 '랩터스'를 창단해 감독을 맡은 바 있는 e스포츠 1호 감독. 2000년 삼성전자 칸과 2001년부터 KTF 매직엔스 감독을 맡았던 e스포츠계의 대부다.

최고의 선수들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안주하지 않았던 정수영. 그의 지독하다시피한 지도 철학은 '빠다 정'이라는 악칭을 남기기도 했고 단 한 차례도 단체전 우승을 하지 못해 '준우승 징크스'라는 악연을 남기기도 했다. 또 감독 교체시 마다 그의 복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문득 2000년대 e스포츠 프로리그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정수영(40) 전 KT 감독의 최근 행보가 궁긍해졌다. OSEN이 21일 새벽 정수영 감독을 목동의 한 맥주집에서 만났다.

늦은 시간에 만났지만 정수영 감독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는 활기가 넘쳤다. 정 감독은 만나자마자 이영호의 우승 얘기를 먼저 화제로 잡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아 그리고 내 말이 맞잖아요. (이)영호가 우승한다고. 요즘 너무 잘한다니깐 그냥 잘하는게 아니라 예전에도 좋았지만 경기를 읽는 눈이 몰라보게 더 좋아졌어. MSL도 이영호가 먹을 수도 있겠는 걸. 하지만 (이)제동이도 워낙 잘하니깐 이번 주 토요일이 너무 기대됩니다".

2006년 2월 스카이 프로리그 2005 그랜드파이널 2-4 패배. 상대 출전 선수를 모두 예상하고도 무너진 완패로 결과는 준우승이었다. 프로리그 통산 세 번째 준우승이었다. 팀리그를 포함하면 네번째 단체전 준우승. 그리고 3월 정수영 감독은 총 감독으로 물러나 야인이 됐다.

"물러난 것 후회없어요. 당시에는 제가 빠지는 게 맞았어요. 그동안 시각을 내부적으로 보지 않고 외부로 돌렸어요. 중국에 나가서 게임관련 일을 했죠. 중국의 게임시장과 프로게임단 현황을 살펴보면서 한국e스포츠 시장과 비교 분석을 했다. 같이 갈 수도 있고, 한 단계 더 발전했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맞춰서 한국에 들어와 곰TV 경기감독관을 하기도 했고요. 최근 중국시장하고 동남아 시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새롭게 출시될 스타크래프트2에 대한 대비 전략을 세우고 있죠.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요".

정수영 감독이 KT 감독서 물러난 이후 송호창 주훈 성재명 김철 김혁섭 감독 등도 물러났다. 정작 본인은 감독 모집에 관심이 없었지만 항상 그는 감독 물망에 올랐다. 감독 시절 '너무 강했던 성격 탓'에 주변의 견제도 심했다. 인심을 얻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진정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정 감독이 이제는 복귀하는 게 맞지 않냐는 평가도 함께 공존했다.

감독 복귀에 대해서 그의 대답은 '지금은 시기상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정말 e스포츠계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복귀하겠다는 뜻도 함께 전했다.

"자리에 아직까지는 욕심 없어요.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줘야죠. 물론 시도한 적도 없어요. 저의 역할은 시장을 만들고 활성화시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다들 너무 잘하고 잘 운영하는 것 같아요. 프로포즈 받은 적은 있지만 후배 감독들이 잘하고 있는데 들어갈 필요는 없죠. 그리고 부담도 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후배 감독들을 잘 지원하고 시장이 커질 수 있는 또 다른 발판을 마련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정말 제가 필요하면 감독이건 코치건 상관없이 복귀할 수 있습니다".

정 감독을 만나 빼 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면 바로 KTF의 23연승 신화.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 중의 기록인 23연승에 대해 정감독은 만감이 교차한 표정이었다.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건데 아직까지 깨지지 않아서 뭐랄까. 다행이면서도 아쉬움이죠. 언젠가는 깨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23연승을 할 때 우린 사실 기록에 대한 생각은 없었어요. 기록 보다 더욱 중요했던 게 팀이었고, 선수 였습니다. 좋은 선수들이 있어도 제 몫을 못하게 하는 건 감독의 책임이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2004년 초반부터 (강)민이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죠. 개인리그서 계속 탈락했고, 프로리그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민이에게 1년 정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몸을 만들라는 주문을 했죠. 예선은 나갔지만 경기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정도였어요. 8개월이 지나 몸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자 민이에게 프로리그 시작 전 무조건 에이스결정전을 맡아라라고 주문을 했어요. '너가 나오는 걸 알아도 못 막는다'면 부활할 수 있다라고 힘을 줬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쉽다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지 못한 건 빼 놓을 수 없지만(웃음)".

23연승 고비에 대해 묻자 정 감독은 "지금 웅진 당시 한빛과의 경기였습니다. 아마 18연승쯤 했을 때 일겁니다. 23연승을 하면서 제가 유일하게 빠졌던 경기였죠. (홍)진호에게 맡기고 출전한 상황이었지만 회사 워크숍이었고, 설상가상이라고 복귀하는 과정에 차가 웅덩이 빠지면서 마음이 너무 심란했죠.

경기장에 가지 못하고 있는 0-2로 지고 있다고 연락을 받은 뒤 여기서 연승이 깨지겠다 싶은 상황서 내 불찰이라는 생각을 했죠. 한빛 이재균 감독에게 '재균아 살살해' 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잠시 뒤에 답장이 왔어요. '뭘 살살하라고. 정 감독님이 밥 사라고 3-2로 역전패 당했다'는 문자가 왔는데 선수들에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정 감독이 몸담었던 KT가 얼마 전 프로게임단 창단 10주년을 맞았다. 10년의 역사를 지녔지만 우승 타이틀이 없는 아쉬움은 누구보다 정 감독이 컸다. 한스러운 마음도 남아있었고, 지금 맡고 있는 이지훈 감독이 꼭 우승의 한을 풀어달라는 주문, 아니 부탁을 빼놓지 않았다.

"우승 못한 것 저 보다 한스러운 감독은 없을 겁니다. 제가 못했던 게 우승이잖아요. 요즘에도 광안리 무대나 장충체육관에서 똑같은 상황의 꿈을 꿉니다. 최근 KT가 잘하는데 좋은 결과로 마무리 됐으면 합니다. 제가 몸 담았던 팀이라 애정이 크죠.

이제 KT가 10년이 됐는데 1주년 된 기분으로 했으면 합니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KT는 이 판에서는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e스포츠 리더로써 KT라는 이름에 걸맞는 팀이 됐으면 하고, 10주년이라고 터줏대감이라고 보기 보다는 e스포츠를 끌어가는 선구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비전을 가지고 왜 프로게이머가 됐는지 왜 프로게임단에 들어왔는지를 잃지 않아야 해요. 기업의 임직원들이 열심히 벌은 돈을 보람있게 잘 쓰고 있다는 사실을 선수들이 인지해서 회사의 이름을 날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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