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항공사 승무원들을 조사해보니 신혼 여행지 1위가 하와이였다. 2위는 어디였을까? 몰디브·괌·사이판·타히티 같은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정답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였다.
333개의 섬으로 이뤄진 피지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낙원(樂園)으로 불린다. 조용한 고급 리조트는 낭만을 꿈꾸는 신혼부부에게 제격이고 북쪽의 섬 바누아 레부는 세계 3대 다이빙 코스 중 하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의 촬영지 모누리키에 가면 다이아몬드를 깔아 놓은 것 같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밀어(密語)를 속삭이는 연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지를 다녀간 연예인만 해도 링고 스타, 피어스 브로스넌, 줄리아 로버츠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2004년 12월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감독 멜 깁슨이 영화 흥행으로 돈을 벌자 1500만 달러(당시 150억원)를 주고 섬 '마고'를 구입했다.
피지가 100년간 영국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원주민들은 18세기까지 식인종이었다. 흙땅을 맨발로 걸어다니며 덫을 놓아 산돼지를 잡는 원주민이 아직도 인구의 절반인 나라가 바로 피지다.
◆천상의 낙원을 떠나 피지의 심장으로
피지 국제공항은 수도인 수바가 아닌 난디에 있다. 많은 신혼부부가 수바로 이동하지 않고 서쪽의 리조트에서 즐기기 때문에 피지의 수도가 난디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피지는 11월부터 3월까지 여름이다. 최고 30도를 넘나드는 온도도 그렇지만 습도가 높아 더 덥고 끈적끈적하게 느껴진다. 공항에 내리면 벌써부터 더위를 못이겨 부채질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 나라의 국제공항이지만 규모는 한국 지방 공항 정도 크기다. 한쪽으로 약 50m 뻗어있는 면세점에선 직원들이 "불라(Bula·안녕하세요라는 뜻)!"라고 외치며 호객행위를 하듯 손짓한다.
난디의 서쪽에 인공섬 데나라우가 있다. 호텔, 고급 주택, 골프장이 즐비해 부호(富豪)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가장 고급이라는 수바행(行) 버스를 탔다. 에어컨은 잘 나오지 않았고 선팅이 된 창문은 곳곳이 벗겨져 있었다.
길목 풍경은 영화 '디스트릭트 9'에 나오는 판자촌 같았다. 집들 사이에 담이 없는 대신 철조망이 있다. 주민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거나 대로변 그늘에 앉아 지나가는 버스를 따라 눈동자만 움직였다.
버스 운전사 토니에로 코로모토(28)는 "리조트 같은 휴양지를 운영하는 사람의 경우 일년 내내 큰돈을 벌 수 있겠지만 다른 직업에선 큰돈을 만지지 못한다"고 했다.
난디에서 출발한 지 약 1시간 30분이 지나자 "화장실에 다녀오라"며 버스를 잠시 세웠다. 'Hide Away'라는 리조트였다. 유리구슬 같은 물을 담은 수영장은 수많은 야자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배불뚝이 백인 남성도 있었고 영화배우 같은 미녀도 의자에 누워 선탠을 했다. 손자와 함께 리조트에 왔다는 영국의 톰슨(61)씨는 "어딜 가도 이런 낙원은 없을 것"이라며 여유롭게 웃었다.
◆낮과 밤이 다른 피지
17만 명이 사는 수바엔 정부 청사·대통령 궁·시장·공원 등이 있다. 평화로워 보이는 피지지만 지난 10년간 3번의 쿠데타가 발생하기도 했다. 힌두교인들이 30% 정도 살고 있기 때문에 사원도 도시에 있다.
피지 사람들은 쳐다보기만 해도 '불라'를 외친다. 10년간 '서던 크로스 호텔'을 경영해 온 강재식(42) 사장은 "피지인들은 가족 중심적 정서를 갖고 있어 예의만 갖추면 잘 통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말했다.
수바의 앨버트 공원은 럭비를 즐기는 무리와 공놀이를 즐기는 가족들로 붐볐다. 12명의 대가족을 데리고 온 맥스(46)는 "사방에 공원이 있어 가족들과 어디든 나가 오후 시간을 즐기곤 한다"고 말했다.
정부 청사나 대통령 궁과 같은 국가의 주요 건물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쿠데타 정부이기 때문에 경비가 삼엄할 거라고 예상했던 대통령 궁 또한 정문을 지키는 경비원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해지고 난 피지의 모습은 낮과 전혀 다르다. 10년째 이곳에서 일식당을 하고 있는 한 교포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금방 구분하기 때문에 밤에 혼자 다니면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관광객이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나 디지털 카메라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실제 지난 8일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 오후 8시50분쯤 숲 속에 숨어 있다 나타난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각 나라의 '피지 사랑'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특히 일본은 교육에 투자를 많이 한다. 수바엔 오세아니아 쪽에서 호주의 시드니 대학 다음 간다는 '남태평양 대학(The University of the South Pacific)'이 있다.
이 대학 정문에 피지 국기와 일본 국기가 함께 그려진 간판이 커다랗게 서 있던 것은 충격이었다. 간판엔 "일본이 이 대학을 위해 새로운 건물공사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정(情)'을 지닌 원주민들은 아직 그 자리에
피지 원주민들은 부족끼리 모여 산다. 수바에서 90㎞ 정도 떨어진 나세임비투와 같은 곳은 원주민 중 생활수준이 중간 정도다.
밤에는 1m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전력이 공급되지 않아 집마다 소형 발전기를 갖고 있다. 원주민들은 공부를 하러 1~2시간 정도 걷는다. 신발이 있지만 맨발로 다닐 때가 더 많다. 발바닥엔 깊은 상처가 유난히 많다.
피지에서는 군인·경찰·선생님이 인기있는 직업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와이스(19)는 "공부를 더 해 경찰을 하고 싶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해 그냥 목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원주민 사이에선 '나이'가 서열을 결정한다. 젊은이들은 마을 어른 말에 대부분 따른다. 밤에는 한 집에 20명 정도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피지의 전통주인 카바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원주민 중엔 황홀한 리조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다. 그들에겐 집 마당의 야자수 열매가 와인이나 맥주보다 더 맛있는 음료수고 언덕 밑으로 흐르는 깊이 2m가 넘는 강이 리조트의 투명한 물보다 더 좋은 휴식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