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영업통'으로 잔뼈가 굵은 베이비붐 세대 이영환(53·서울 신천동)씨가 2004년 4월, 19년간 청춘을 바친 외국계 P제약회사에서 떠밀리다시피 나온 이유는 '영어'였다. 지점장까지 승진했지만, 임원승진을 목전에 두고 "영어를 못하면 승진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영어를 잘하는 30~40대 여성 후배들이 이씨를 제치고 임원으로 승진했다. 마지막 퇴근 날, 이씨는 눈물을 삼키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고, 물러서지도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씨는 그 길로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5시 반까지 어린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하루를 보냈고, 홀로 랩(lab)실에 남아 독하게 발음 연습을 했다. 영어 스트레스로 악몽에 시달리다 땀이 흥건한 채 깨는 밤이 매일 계속됐다.

실력 키우기

712만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올해부터 집단 정년을 맞기 시작하지만, 이미 퇴직한 뒤 세상을 따라잡으려 치열하게 살아가는 베이비붐 세대도 많다. 자의든 타의든 일찍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 사람들은 '세상에 뒤처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씨는 만학(晩學)으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퇴직 2년 만인 2005년 12월 외국계 M제약회사에 영업상무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그런데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고 "다 결정됐다"는 헤드헌팅 업체의 말을 믿고 사표를 냈는데, 막판에 틀어졌다. 그렇게 또다시 백수의 길로 들어선 때가 지난 2007년 12월이다. 세상이 야속했지만 이내 '한 번 해본 건데 두 번은 못하겠냐'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씨는 요즘 아침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요양보호사 학원에 다니고 저녁 시간에는 주택관리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틈틈이 영어신문과 방송을 보면서 영어 실력을 연마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씨는 "최고의 목표는 제약회사 임원 재취업이지만, 만약을 대비해 자격증을 따고 다른 능력을 키우고 있다"며 "'평생 현역'이라는 마음으로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부지런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영훈 라이프커리어전략연구소장은 "일찍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들은 젊은 세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며 "상당수는 외국어나 컴퓨터, 재테크 등을 배우며 인생 2막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영환씨는 은퇴 후‘고3 수험생’같은 삶을 살았다. 12일 서울 송파구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이씨가 자신의 노트북으로 CNN 방송을 보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저술·자원봉사

2005년 육군 중령으로 제대한 전철호(55·충북 청주)씨는 자신의 역할을 글쓰기와 봉사활동에서 찾았다. 얼마 전 수필집을 냈고, 앞으로 불교 성지순례기 등도 출간할 계획이다. 충불사(충북 불교를 사랑하는 모임·회원 834명)를 이끌고 있는 전씨는 한 달에 4번 정도 불자들을 모아 성지순례·등산을 한다.

월 5~6회는 독거노인들에게 반찬을 배달하는 봉사활동이며, 무료급식 봉사에도 참가한다. 이런 일상에서 경험한 일들은 지방 일간지에 칼럼으로 풀어내고 있다.

전씨는 청주시 평생학습관의 '모범 학생'이다. 일주일에 2번은 컴퓨터(포토샵·플래시), 2번은 한자 수업을 듣는다. 전씨는 "한자 1급 자격증을 따면 공부방에서 어린이들에게 한자 지도 봉사활동을 할 예정이고, 컴퓨터는 홈페이지 관리를 위해서 배운다"고 말했다.

경험 바탕 컨설팅

삼성생명·삼성화재에서 22년간 근무하고 2006년 12월 명예퇴직한 이근혁(50)씨는 은퇴 무렵 경력과 전공을 살려 재무 설계 1인 기업('부자마인드연구소')을 차렸다. 이씨는 일찍부터 경매컨설팅 자격증(1998년)과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2002년), 공인중개사(2003년) 자격증을 따 준비가 빨랐다.

이씨는 "한창때라고 생각했던 동료들이 줄줄이 명퇴하고, 똘똘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보며 위기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주말에는 거의 국립도서관에서 공부하며 하루를 보낸다. 엑셀프로그램 등 컴퓨터 활용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부단히 공부하고, 재무설계 관련 지식과 안목을 넓히기 위해 독서와 자격증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인생 되돌아보기

숨 가쁘게 살아온 현역 생활을 전국 일주 등 여행을 하며 되돌아보는 은퇴자들도 있다. 지난해 9월 K은행 지점장에서 퇴직한 도득한(56·안양시 비산동)씨는 요즘 매일 오전 10㎞를 걷고 오후에는 집 근처 관악산을 1시간30분씩 오르며 몸을 만들고 있다. 올봄 날씨가 풀리면 3개월 일정으로 서해안~남해안~동해안을 도는 전국 도보 일주를 계획하고 있다. 도씨는 "31년 직장생활 등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볼 계기가 필요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설계도 하면서 걸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한경혜 교수(아동가족학과)는 "베이비붐 세대는 '삶이란 스스로 기획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첫 세대라는 점에서 전(前)세대와 확연하게 다르다"며 "재교육·재취업·사회봉사 등 영역에서 이들의 역할이 점점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연중기획] 베이비붐 세대 '2010 쇼크'
은퇴 후에 부부가 정답게 지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