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얘기 하나. 삼국지를 읽으면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인물은? 이 물음에 열에 아홉은 제갈량이나 사마의 같은 책사들, 혹은 관우나 하후돈 같은 맹장들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마취도 없이 독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받으면서 태평스럽게 바둑을 뒀던 관운장의 기백보단 그를 집도했던 화타(華陀)의 명성에 더 관심이 간다. 편작(扁鵲)과 더불어 전설적 명의(名醫)로 칭송받는 그 화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자리에 오르기를 열망한다. 이런 사정은 의사들이나 치과의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환자의 입장에서 보다 유능한 의사를 찾는 것은 당연지사, 인지상정이다.
오늘날 의학이란 학문이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전수되고 있고, 그 덕분에 의사들의 실력은 매우 상향평준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명의에 대한 전설은 끝이 없다. 천재적인 심장외과 전문의나, 조선시대에 성인에 가까운 경지를 보였다는 허준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왜 인기를 끌까. 그것 역시 '전설적 명의'를 수소문하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명의란 허문(虛聞)이기도 하다. 필자도 고백할 게 있다. 변변치 못한 치과의사인 나에게도 명의라는 과분하기 짝이 없는 찬사를 안겨주었던 몇몇 헛소문들을 털어놓고자 한다.
급하게 치과를 찾게 만드는 상당수 급성질환들 중에 예를 들어 급성치수염이 있다. 이 경우 환자에게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유발한다. 근데 이 질환의 흥미로운 점은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격렬한 통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과의사의 손이 한번 닿기만 하면 바로 통증이 가라앉는 질환이라는 것이다. 사실 치과의사의 입장에선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은 질환이다. 그렇지만 환자의 입장에선 치과에 가자마자 통증이 가라앉으니, "그 의사 참 명의더라" 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는 심각한 기능부전을 유발함에도 불구하고, 그 치료법은 매우 간단한 경우이다. (동료 의사분들이시여 용서하소서!) 필자는 오래전에 마산 도립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에피소드다. 장마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땀에 흠뻑 젖은 초등학생 환자가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젖었느냐고 물으니, 밀양에서 병원이 있는 마산까지 걸어오느라 그렇게 됐단다.
안쓰러운 마음에 서둘러 환자를 앉히고 병원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발음이 정확하게 되지 않아서 주변사람들로부터 소위 '반벙어리'라고 놀림을 당해서 왔다고 했다. 잔뜩 긴장해서 진찰을 했다. 그런데 원인은 의외로 간단했다. 혀를 당기는 인대(설소대)가 짧아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시술이라 간단히 처치를 하고 난 필자의 앞엔 두 가지 당혹스러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그 초등학생 환자가 공교롭게도 의료보호 대상자였었다. 의료보호 대상자의 경우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이라 정부에서 모든 의료비용을 지불하게 되는데, 환자의 보호자께선 그 사정을 모르셨는지 필자가 치료비를 받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셔서 필자에게 명의이자 대단한 인격자라는 가당치 않은 칭찬을 하셔서 몸 둘 바를 몰라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는, 그것을 계기로 "도립병원에 벙어리를 고치는 명의가 있다더라"라는 헛소문이 퍼져버렸다는 것이다. 증세는 비슷하더라도 그러한 증세를 유발하는 원인은 다양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소문이 퍼지다 보니 많은 농아인들께서 방문하셔서 필자는 그 오해를 풀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물론 필자는 '명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같은 교육과정을 이수한 의사라고 할지라도, 각자의 재능과 노력의 정도는 천차만별일진대 어찌 모두가 같은 기량을 갖출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나라에서 명의들이 많이 나온다면 그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또한 무한경쟁 시대에 각 병의원들도 상대 경쟁자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기본'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진료실 및 기구의 멸균소독 문제만 하더라도 개선되기 시작한 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비전문가인 환자의 입장에서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의료행태에 대한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 사실 이러한 점들은 굳이 '명의'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부분들이고, 좀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이 있는데, "공부는 못해도 좋다. 씩씩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 카피 같은 말이 한동안 유행했었다. 필자 역시 반평생을 기초 치의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자식뻘인 제자들에게 유능한 치과의사가 되라고 가르쳐 왔으며 바라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임상 현장의 현실을 접할수록 필자가 재학생들에게 하는 설교의 내용은 조금씩 변해가는 듯하다. "명의는 못 되어도 좋다. 다만 기본을 지키는 의사가 되어다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