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지 징징!"
전자기타가 쩌렁쩌렁 울렸다. 군부대 교회(132㎡·40평)가 후끈 달아올랐다.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은 까까머리 장병 150명이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쳤다. 군모에 전투복을 입은 장교 1명과 장병 8명이 전자기타, 통기타, 마이크, 드럼 스틱 등을 들고 동료들 앞에 섰다. 최해원(24) 소위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이곳에 서니 너무 좋아서 바지에 오줌을 쌀 것 같습니다!"
맨바닥에 방석 깔고 앉은 장병들, 목제의자에 다닥다닥 붙어앉은 장병들 사이에서 박수, 휘파람,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악기를 잡은 장병들이 진짜 록 밴드를 방불케 하는 폼으로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18일 오후 1시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육군 제1군단 11화학대대에서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부대 안에 있는 혜성교회에서 이 대대 장교와 장병들로 구성된 '혜성밴드'가 데뷔 무대를 가진 것이다.
이들은 지난 7월부터 5개월간 '민간인 스승'을 모시고 음악 연습을 해왔다. 시각장애인 7명으로 구성된 '실로암 7.1 밴드'(이하 실로암밴드)가 밴드 경험자부터 왕초보까지 뒤죽박죽 섞여 있는 장병들을 맹훈련시켰다. 실로암밴드는 멤버 전원이 한 치 앞도 못 보거나 가까운 물체만 간신히 분간한다. 이들은 악보값과 점심값을 계산하면 무보수나 다름없는 돈(매주 4만원)을 받고 매주 이 부대를 오갔다. 이 밴드 허경민(37) 단장은 "보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순수한 자원봉사였다"며 "장애인이라고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7월 부대에서 상견례할 때만 해도 분위기가 어색했다. 실로암밴드에는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물론 군부대 안에 들어와 본 사람조차 한명도 없다.
장병들도 쑥스러워했다. 정민우(20·통기타) 일병은 "기타를 잡아본 것 자체가 처음인데, 앞이 안 보이는 선생님이 과연 나 같은 초보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했다.
부대장 김현식(43) 중령의 생각은 달랐다. 11화학대대는 올해 국방부·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시범적으로 음악교육을 실시한 전국 83개 군부대 중 하나다. 해당 부대들 가운데 유일하게 시각장애인 밴드에 교육을 의뢰한 이유로 김 중령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 이 세상을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사는 법을 배울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화학대대 특성상 부대원 대부분이 대학 다니다 입대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사회에 진출한 장병들과 달리 아무래도 개성은 강하고 극한의 어려움을 겪어 본 경험은 적은 편입니다. 이들에겐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연습을 위해 실로암밴드 멤버들은 오전 7시까지 서울 관악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 모여 기타와 키보드 등을 복지관 버스에 실었다. 기타 지도를 맡은 이상엽(36·베이스)씨는 "멤버들이 악보를 나눠준 뒤 일일이 코드를 잡는 시범을 보이고, 장병들의 손을 잡아 기타 줄 위에 올려놓고 제대로 하는지 확인했다"고 했다.
밴드 이름은 연습장 겸 공연장인 교회 이름을 따서 지었다. 레퍼토리는 김현식의 '비 오는 날 수채화'부터 포미닛의 '핫이슈'까지 폭넓게 잡았다. 고음 부분에서도 굵직한 저음으로 일관하는 장병들에게 실로암밴드 보컬 노현희(21)씨가 복식호흡을 가르쳐 음정을 끌어올렸다.
혜성밴드 멤버 정병현(19) 상병은 "고교 시절 가수가 되고 싶어 인천 집을 뛰쳐나와 경기도 양곡에서 두 달간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너만큼 노래 잘하는 사람은 많다'는 말을 많이 들어 가수의 꿈을 포기했어요. 군대에 온 뒤 '내가 너무 쉽게 포기했구나' 싶고, '남자에게 포기란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군에서 밴드 활동을 재개했다고 전화했더니 부모님도 좋아하셨어요."
전자기타를 친 김성동(20) 일병은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했다. 부경대 공대에 다니다 입대한 김 일병은 "대학 입학 후 학과 공부하느라 기타 줄 한 번 못 튕겨봤다"며 "다시 연주를 시작한 뒤로 군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고 했다. 전역(2011년 2월)은 까마득하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연습해 군 입대 전 7개월간 사귀다 온 여자 친구에게 실력을 보여줄 계획이다.
이날 혜성밴드와 실로암밴드는 차례로 무대를 달구다 막판에 합동 공연을 벌였다. 장병들의 열광 속에 앙코르곡을 열창한 혜성밴드 보컬 박민수(20) 일병이 부리나케 화장실로 뛰어갔다. 박 일병은 "긴장해서 그런지 너무 급했다"고 했다. 관객으로 온 서창하(23) 병장은 "군 생활 하면서 이렇게 큰 에너지를 얻은 경험이 없었다"고 했다.
실로암밴드 단장은 "우리는 멤버 전원이 독학(獨學)으로 음악을 익힌 선천성 장애인"이라며 "혼자 힘으로 어렵게 배운 음악을 장애가 없는 군인들에게 자원봉사로 가르쳐 뿌듯하다"고 했다. 김 중령은 "장병들로부터 '내년엔 밴드 인원을 늘려달라'는 민원이 5건 넘게 들어와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