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독서 에세이로 확고한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정혜윤씨는“《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내가 읽어 알게 된 세상을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저 자신이 너무 진부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통해서 달라지고 더 나아지고 싶은 욕구에서지요."

지난 10월 발간돼 6000부가 팔리며 순항하고 있는 《런던을 속삭여 줄게》(푸른숲)의 저자 정혜윤(40)씨는 현직 라디오 PD이다. CBS에서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고 지금은 음악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정씨는 '독서 에세이'라는 오래고도 흔한 장르에서 새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를 단 데뷔작 《침대와 책》(웅진지식하우스·2007)은 책과의 '짜릿한 연애'를 속삭이듯 서술했다. 지난해 선보여 2만2000부가 팔린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푸른숲)는 은희경·김탁환·임순례·문소리 등 널리 알려진 독서가 11명과의 인터뷰집이고, 신작 《런던을 속삭여 줄게》는 웨스트민스터 사원·트래펄가 광장 등 런던의 명소 8곳을 소설과 영화·그림·노래를 실마리로 풀어나간 책이다.

정씨가 해마다 한 권씩 펴내는 책은 독특한 상상력을 탄탄하고도 유려한 문장에 담아내며 마니아층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다. 가령 《침대와 책》의 '세월은 가고, 헛되이 나이 들어가거나 늙어간다고 느낄 때'에 나오는 구절은 이렇다. "보르헤스가 〈목격자〉란 글에서 던졌던 그 질문. '만일 내가 죽으면 나와 함께 무엇이 죽고 세계는 서글프고 부서지기 쉬운 어떤 형상을 잃게 될 것인가?' 보르헤스에겐 그것이 목소리·거리·책상 속의 물건들이었다. 나에겐? 나의 올 나간 스타킹들, 목동의 거리, 1년 내내 꼬마전구가 켜져 있는 호프집들, 굽이 닳은 신발들. 반디앤루니스, 끈 없는 브래지어들, 반쯤 닳은 아이섀도와 립스틱들, 내 이름?"

여기서 잘 드러나듯 그동안 독서 에세이들의 주어가 '책'이었다면, 정씨의 글은 '나, 정혜윤'이 주어다. "책이 주인공이 아니고 사람이 중심에 놓인 책을 내는 이유는 독서행위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씨는 온라인 서점 등을 중심으로 방대한 독서량과 깊이, 섬세하고 관능적으로 풀어내는 글 솜씨로 북 마니아들과 출판사 에디터·독자들을 자극해온 유명 독서칼럼니스트로 출발했다. "어쩌면 제가 라디오 PD라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네요. 늘 소리와 문장으로 이뤄진 세계에 상상력을 입히고 싶어했었습니다. '자, 한번 들어봐' 이런 말들은 제게 늘 어떤 떨림을 주지요."

정씨 책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 표지다. 첫 책은 《보그》 《엘르》 등 세계적 패션 잡지에서 각국의 유수 모델들과 작업하고 있는 한국계 케이티 킴(K.T. Kim)이 찍었고, 두 번째 책은 뉴욕에서 인정받고 있는 사진작가 김아타가 맡았다. "표지에 책을 읽는 누군가가 등장하길 바랐어요. 사진작가 분이 이왕이면 저자가 직접 모델로 나서보라고 권유하대요."

특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자신의 글을 닮았는지 정씨는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패션을 즐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계에서 온 듯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정씨는 "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저 자신의 욕망을 좇는 게 저한테는 늘 중요한 문제입니다"라고 말한다.

정혜윤씨는 인터넷서점 두 곳에 독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그녀의 '대표적 연인'은 보르헤스·뒤라스·도스토옙스키·칼비노 등이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 만나는 일을 여전히 두려워하지만 책 이야기를 나눌 땐 모든 걸 잊는다는 정씨는 "누군가 내 책을 읽고 자기 삶의 작은 '단서'와 진정한 욕구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