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1일 전남 고흥군 점암면 한 마을에 빨간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낀 60대 남성이 나타났다. 8년 전 이웃을 살해한 혐의로 뒤늦게 붙잡힌 용의자 박모(60)씨가 검찰의 범행 현장검증에 나온 것이다. 주민들은 "어떻게 같은 마을 사람을 무참히 살해할 수 있느냐. 인간도 아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박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순순히 범행을 재연했다.
박씨는 2001년 1월 9일 밤 10시30분쯤 이웃 주민 조모(당시 65세)씨 집에 침입, 스카프로 조씨의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시신을 마을 주변 대나무밭에 옮겨 옷을 벗기고 신체 일부를 훼손하는 엽기 행각을 벌였다는 게 검찰의 설명. 검찰은 "특별한 원한 관계 없이 성폭행 과정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사건 당일 숨진 조씨와 함께 술을 마신 것으로 드러나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 수사까지 받았지만,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 그대로 풀려났었다. 이후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흥판 '살인의 추억'은 이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는 듯했다.
그러나 광주지검 순천지청 강남석 검사가 지속적으로 의문을 품고 올해 재수사에 착수했고, 지난 7월 박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당시 강 검사는 "허술한 초동수사의 어려움을 딛고, 늦게나마 숨진 피해자와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게 됐다"고 자평했다. 검찰은 구속기소한 박씨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2일 이 사건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날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씨에 대한 범행 입증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지속적으로 자백했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범행 도구 등의 뚜렷한 물증이 없고, 자백의 내용이 앞뒤가 맞지 않는 등 자백의 신빙성이 떨어져 유죄 입증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검찰은 "박씨는 분명히 조사과정은 물론, 재판 과정에서조차 범행을 모두 인정했는데 무죄가 선고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
입력 2009.12.03.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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