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는 한족 중심의 역사였다. 한족의 지배가 정통성을 가졌고 유목민족인 북방민족의 지배에 대해서는 수치스러워 했다. 하지만 한족이 '오랑캐'라고 폄하한 그들도 문화와 역사를 가지며 중국대륙 역사의 한 몫을 담당했다.

거란족이 세운 요(907~1125), 여진족의 금(1115~1234)왕조에 이어 몽고족이 건립한 원(1271~1368)나라는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됐다. 원나라는 유목민족이 세운 몽골제국의 직계 국가인 동시에, 중국화 된 명칭과 제도를 가져 중국 역사상 통일왕조로서의 위치도 가졌다. 이는 원 세조인 쿠빌라이가 강압적으로 한족을 지배하기보다는 그들의 선진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고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시키며 한족과의 동화를 추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원나라는 100여 년간 통일 왕조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한족이면서도 원을 섬겨 비난 받은 조맹부

중국 원나라 때의 고위층 관리이며 대표적 화가이자 문학가, 서예가였던 조맹부(趙孟?, 1254~1322)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송나라 황실의 후손으로, 원나라 때 벼슬에 나가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영록대부(榮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죽은 후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원 나라의 대표적인 교양인으로서 정치, 경제는 물론 시서화(詩書畵)에도 폭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산수, 인물, 동물 등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고, 글씨 또한 훌륭했다. 훗날 청나라 건륭제가 그의 글씨를 좋아해 모방했을 정도다. 시 작품으로 '송설재집(松雪齋集)'이 있는데, 그 중 뛰어난 작품이 적지 않다. 아들과 부인도 모두 그림에 능했으며, 원나라 말기의 대표적인 문인 산수화가 왕몽(王蒙)은 그의 외손자이다.

그러나 조맹부는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기며 영달했다는 이유로 후세에 비난을 면치 못했다. 조맹부의 그림 '인기도(人騎圖)'는 원나라 조정의 부름을 받아 말을 타고 가는 자신의 모습과 직접 쓴 글을 담은 작품이다.

조맹부, '인기도', 원(1296년), 종이에 채색, 30×52㎝,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복고주의(復古主義) 운동 전개

조맹부는 당시 복고주의를 주창했다. 그림에서는 바로 앞선 남송시대의 화풍을 타파하고, 그보다 앞선 당과 북송시대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서예에서도 당나라의 안진경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했던 서풍을 배격하고, 진나라 왕희지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조맹부는 왕희지의 글씨를 깊이 연구해 후대의 서예에 큰 영향을 준 '조체(趙體)' 또는 '송설체(松雪體)'라 불리는 아름답고 세련된 자태의 독창적인 글씨를 만들어 냈다. 그의 글씨는 잘 정돈됐으며 근엄하면서도 우아한 운치가 있다. 필법은 둥글고 윤택하면서 굳세며 흐름이 유창하다. 글씨에 아름다운 형태미를 불어 넣어 왕희지의 전통적 서예미를 충실히 계승, 부활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송설체는 중국은 물론 고려 말부터 조선 전반기까지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조선 초기 서예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견 작)'의 발문이 있는데, 이는 조맹부의 '송설체'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조맹부는 화법 또한 독창적이어서, 글씨를 쓰는 붓과 그림을 그리는 붓은 같은 사용법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글씨와 그림은 본래 하나'라는 뜻의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과 '서예의 필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서화일치론(書畵一致論)'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 중국 미술사에서 큰 영향력을 차지하는 문인화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 생각해볼 거리

많은 한족의 지식층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던 것에 반해 조맹부는 송나라 황실 후손이면서도 이민족 국가인 원나라의 관리로 출세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배반자였던 셈이다. 비난을 받는 조맹부의 정치성과 뛰어난 서화작품의 예술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