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남동쪽 애들레이드(Adelaide)에서 비행기로 40분 정도 가면 ‘캥거루 아일랜드’(Kangaroo Island)라는 작은 섬에 닿는다. 주민들의 반대로 다리를 놓지 않아 호젓하고 조용한, 섬다운 섬의 모습을 간직한 휴양지다. 동서 150㎞, 남북 최장 57㎞ 규모인 캥거루 아일랜드는 태즈메이니아, 멜빌에 이어 호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이달 초 이 섬을 찾았을 때 호주인 가이드 팀 그릭(Grigg)씨가 설명해준 ‘캥거루 아일랜드’라는 섬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1800년대 호주에 온 영국인 탐험가 매튜 플린더스(Flinders)는 미개척 대륙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호주의 생태가 북반구와 완전히 다른 탓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먹을 만한 가축은 원주민들이 모두 가둬두고 있고 캥거루 같은 야생동물들은 사람이 100?밖에 있어도 알아차리고 도망가버렸다. 말 그대로 풀 뜯어 먹으며 사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플린더스씨는 배를 타고 캥거루 아일랜드(당시엔 이름이 없었던…)에 닿는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 유칼립투스 나무가 무성한 야생의 섬이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배에서 내리는 순간 플린더스씨 눈에 캥거루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사람이 다가오는 것만 느껴져도 벌떡 일어나 도망가던 캥거루가 어쩐 일인지 눈을 껌벅껌벅하며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동물이 될 수 있는지를 모르는, 착하고 순한 캥거루가 플린더스씨에게는 걸어 다니는 만찬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손으로 캥거루를 잡아서 주린 배를 채웠다. 몇 달 동안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후 즐긴 배부른 한 끼였다.
기력을 회복한 플린더스씨는 자신에게 다가오던 그 착한 캥거루를 기리며 이 섬에 ‘캥거루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다는 관행을 깨고 동물 이름이 붙은 섬이 탄생한 것이다.
그릭씨의 설명은 여기까지.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찾아봤더니 ‘섬 이름이 캥거루 아일랜드인 것은 섬 모양이 캥거루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평이한 설명이 눈에 띄었다. 지금부터 200년이나 지난날의 일이고 공신력 있는 자료가 남아있을 리도 만무하니 정확한 정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역시 이야기가 생생한 첫 번째 설(說) 쪽이 좀 더 흥미진진해 보인다.
지금도 캥거루 아일랜드에는 캥거루가 지천이다. 이 섬의 캥거루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다른 캥거루들과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서부 회색 캥거루’(Western Grey Kangaroo) 종에서 파생했다는 캥거루 아일랜드의 캥거루는 호주 본토 캥거루와 비교하면 덩치가 작고 털이 길고 검다.
이 섬을 찾았던 10월 말, 으슬으슬 흐리고 비가 내렸다. 남반구에 있는 호주는 북반구와 계절이 정반대. 건조한 땅에 내리는 달디단 봄비였다. 호주는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비 내리는 날은 ‘기쁜 날’로 여겨진단다. 그릭씨는 “캥거루 아일랜드에는 정말 캥거루가 많지만 가까이서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캥거루는 경계심이 많고(플린더스씨 ‘사건’이 있은 지 200년이 지난 지금, 캥거루는 당연히 사람을 경계한다) 귀와 눈이 밝기 때문에 사람이 다가가면 굉장히 빨리 도망간다. 캥거루를 발견하면 천천히 한 발자국씩 움직이되 캥거루가 두 발로 서면 ‘도망가겠다’는 뜻이므로 그 자리에 멈춰서야 캥거루가 놀라 도망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켈리 힐 자연보호 공원’(Kelly Hill Conservation Park)를 돌아다니며 캥거루를 찾았다. 비 덕분에 발소리가 부드러워서인지 캥거루들은 멀뚱멀뚱 사람을 쳐다볼 뿐, 도망갈 생각을 안 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뜻밖의 귀한 장면과 마주치게 됐다. 캥거루 수컷 두 마리가 암컷 한 마리를 놓고 ‘펀치’를 날리며 싸우는 ‘캥거루 싸움’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진행 과정은 이랬다. 덩치 작은 암컷 한 마리를 덩치 큰 수컷이 따라간다. 이들 뒤로 또 한 마리의 수컷이 따라붙는다. 수컷 두 마리는 서로를 노려보더니 공이 울린 것처럼 동시에 두 발로 일어서 권투선수 같은 자세를 취했다. ‘퍽!’ 약 3초 만에 승자는 결정되고 패자는 깨끗하게 물러서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승자는 물론 암컷 캥거루와 나란히, 멀리멀리 뛰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
그릭씨는 “미국에서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다큐멘터리 작가가 왔었는데 6주 동안 헤매다가 간신히 한 장면을 찍어 갔다”며 “진짜 운이 좋다”고 했다. 힘센 녀석이 ‘사랑’을 차지하는 동물 세계의 ‘법칙’이 눈앞에 지나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똑딱이’ 디지털카메라엔 이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까지 남아 있다니….그릭씨가 껄껄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동물 사이의 로맨스엔 와인도 없고, 촛불도 없고, 노(no)도 없다니깐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