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이명박 대통령은 '친서민(親庶民) 정책'을 펴겠다며 '서민'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계속 띄운다. 그러자 장관들을 비롯한 관료들은 물론이려니와 언론매체들도 '서민'이란 단어를 그대로 받아쓴다.

사전적 의미에서 서민은 '넉넉지 못한 백성'이란 경제적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무 벼슬이 없는 평민'으로서 사회적 신분을 뜻한다. 이 대통령의 서민은 아무 벼슬 없는 신분보다는 경제적인 저소득층을 지칭한다는 데서 '저소득층'이라고 해야 옳다. 역사적으로 서민은 봉건사회에서 지배 계급에 짓눌린 피지배 신분을 의미한다. 서민은 은연중 귀족 또는 부유층의 지배하에서 핍박받는 약자라는 피해 의식을 함축한다. '저소득층'을 '서민'으로 지칭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조적인 계급적 피해 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다. 조선조에서 서민은 양반의 지배하에 눌려 살던 사회계급을 말한다. 조선조 후기 고개 든 서민 문학이 중인(中人) 서인(庶人) 서리(胥吏)를 포함한 서민을 주제로 귀족사회의 모순을 고발했다는 데서도 서민은 괄시당하는 피지배 계급으로서 상징되었음을 증언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신분 유습이 사라진 자유민주체제이다. 청소부였던 이명박씨처럼 저소득자가 대기업 회장과 대통령으로 올라설 수 있는 자유민주 국가이다. 저소득자와 고소득자 간의 차이는 단지 재산상의 차이일 뿐, 신분상의 차이는 아니다. 저소득자가 돈을 많이 벌면 당장 고소득자로 치솟는 신분파괴 사회이다. 귀족으로 올라설 수 없었던 조선조의 서민이 아니다. 물론 '친서민'이란 조어는 듣기엔 '친저소득층'보다 간결하고 친근감을 주며 정치적 호소력을 지닌다. 하지만 자조적 피해자 의식과 계급갈등 의식을 조장한다는 부작용을 수반한다. 예컨대 "휘발유 값이 올라 서민이 살기 더 어려워졌다"며 경제 상태를 표현할 경우 '서민'이 아니라 '저소득층'으로 해야 한다. 그에 반해 "전쟁 때 고관대작의 자식은 후방에서 복무하고 서민의 자식은 전방에 배치됐다"라며 신분을 의미할 땐 '서민'으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소득이 적은 저소득층을 '서민'이라고 통칭해 지배 계급에 짓눌린 신분의 굴레를 덧씌운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물론 '서민적'이란 형용사는 '소탈하다' 또는 '귀족적이지 않다'는 의미로 쓰인다. '서민적'이란 형용사는 소탈함을 표현할 때 얼마든지 쓴다. 그렇지만 서민은 박탈과 핍박의 신분이며 계급적 피해 의식을 함의한다는 데서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농사 도우미'를 '머슴'이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민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신분을 동정적으로 표현할 때 쓰는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 우선 저소득자 스스로가 나 같은 서민이라는 자학적 표현부터 삼가야 하고 이 대통령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