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현 기자

"살아남고 싶다면 이불 속 부부싸움까지 자랑해라." 요즘 방송계를 보면, 이런 금언이 꼭 필요할 것 같다.

17~18일 인터넷에는 탤런트 박재훈과 레슬러 출신 아내 박혜영 부부의 살벌한 부부싸움 기사가 순식간에 퍼졌다. "화가 난 남편 박재훈이 아내에게 휴대전화를 집어던지고 욕을 하며 과격하게 싸웠다"는 내용. 당사자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보도인데 실명은 물론 당시 상황까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어느 용감무쌍한 인터넷 연예 매체의 '특종'일까? 기사를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기사는 케이블 채널 SBS E!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결혼은 미친 짓이다' 보도 자료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SBS E!TV는 17일 오전 "박재훈·박혜영 부부가 촬영 중 실제로 부부싸움을 벌였다. '와장창'하며 접시가 깨지는 소리까지 들려 어쩔 수 없이 카메라가 꺼지고 모든 촬영이 중단됐었다"는 내용의 문건을 각 언론사에 뿌렸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등장하는 박혜영(왼쪽)·박재훈 부부, 영화‘여배우들’에 출연하는 배우 고현정(왼쪽).

드라마 속 그악스러운 부부싸움도 시청자들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걸까? 요즘 방송사들은 아예 현실에서 벌어졌다는 부부싸움을 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MBC '세바퀴', SBS '스타 부부 쇼 자기야', '스타 주니어 쇼 붕어빵' 등 각종 오락 프로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가 바로 생생한 '부부 전투기'.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 급조된 진실인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프로들이 가져가는 시청률만큼의 사람들이 남의 집 싸움 구경에 골몰하는 관음증 환자 신세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박재훈 부부의 '육탄전' 중계 보도자료는 이런 방송사의 왜곡된 욕망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결과.

영화계라고 다를 바 없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싸움 자랑이 한창이다. 17일 열린 영화 '여배우들' 제작발표회에서는 톱배우 고현정최지우가 촬영 도중 실제로 싸웠고 그게 영상에 담겼다고 주장하면서 단박에 그날 가장 눈길 끄는 뉴스로 자리를 잡았다. 표독스러운 눈빛 하나만으로도 남성들 오금을 저리게 하던 '미실'의 공력을 '지우히메'가 얼마나 견뎌냈을지 궁금하다면 영화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날 고현정은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키도 비슷해서 싸울 맛이 나더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수시로 크고 작은 싸움에 말려든 나를 확인하게 된다. 피곤하고 괴롭지만 그게 또 삶의 대가 중 하나이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위로와 안식을 얻고 싶은 TV와 영화 속에서도 피 말리는 싸움판에 끼어들어야 하는 현실은 한심하다. 게다가 이제는 '가상'을 넘어선 '리얼'아닌가? 더욱 황당한 건, 물리적 폭력까지 동원된 부부싸움마저 떳떳한 일인 양 홍보되고,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는 상황이다. 정녕 우리는 정신분열적 사회에 살고 있는 걸까?

또 한 가지 끝내 지울 수 없는 건 '과연 그들이 진짜로 싸웠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한때 각종 리얼리티 프로에서 유행한 전략은 이런 거였다.

예고편에 출연자들이 격하게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을 내보내 시청자들 관심을 끈 뒤, 본편에서는 다른 출연자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몰래 카메라'였다며 함께 손잡고 환하게 웃는 것. 고현정도, 최지우도, 박재훈 부부도 어쩌면 대중을 상대로 지금 '몰카'를 찍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심히 과격한 방식으로.

부부싸움에 대한 단상 I
부부싸움 자주하면 오래 사는 이유, 알고보니..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끄는 서로를 위한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