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외교관 엘라드 라츤에게 세종대왕과 한글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언급한 사람이 있다. 엘리에제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라는 사람이다. 한 민족의 언어가 이 사람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부활'했다고 했다. 문자뿐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이스라엘 땅에 도착하면 고대 페니키아문자인 설형문자를 닮은 히브리 문자가 보인다. 이정표는 물론 잡지, TV 자막, 신문, 책 기타 등등 모든 것들이 히브리어로 적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나라를 잃으면 언어도 잃는다.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면서 조선어 교육을 없애고 성과 이름까지 없애버린 것도 다 한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이 35년 동안 나라를 잃었다면 이스라엘은 그 상실의 역사가 2000년이다. 2000년 동안 유대인은 국토와 국민이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히브리어 또한 2000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전역은 물론 해외의 유대인들도 히브리어로 말을 하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쓴다.
히브리어는 고대 유대인이 사용했던 언어다. 2000년 전 나라가 망하면서 유대인들은 유럽과 중동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히브리어는 팔레스타인 땅에 남은 몇 안 되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전락했다. 유럽으로 간 유대인들은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어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로, 독일에서는 독일어로 일상을 살고 돈을 벌었다. 세월이 흘러 19세기 중반, 히브리어로 적힌 유대교 기도문과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유대인은 성인 두 사람 가운데 한 명꼴이었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만이 히브리어로 적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19세기에 유럽 전체에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도 민족국가 재건 운동을 벌이게 된다.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유대인들이 속속 팔레스타인 땅으로 복귀했다. 언어가 다 달랐다. 여기에 벤 예후다(1858~1922)라는 영웅이 나타났다.
1858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벤 예후다는 오토만투르크제국 식민지로 있던 불가리아가 독립운동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유대인국가의 부활을 꿈꾸며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의 머리에는 세 가지 모토가 들어 있었다. ‘집에서 히브리어를’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그리고 ‘단어를 창안할 것’. 정치인들이 국가 체제를 만드는 동안 벤 예후다는 언어를 통한 통합을 꿈꿨다. “조상의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유대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조상의 언어를 회복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다. 러시아어와 영어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어떻게 국가통합을 이룰 것인가.”
벤 예후다는 우선 본인부터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현지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로 대화를 나눴다. 알고 있던 다른 언어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갓난아기였던 아들 벤 아비(Ben Avi)가 집에 있으면 히브리어로만 대화를 나눴고, 아들에게도 히브리어로 말을 걸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손님이 오면 아들을 잠자리에 보내 외국어를 아예 듣지도 못하게 했다. 아들 벤 아비는 훗날 “아버지는 바람 소리, 새소리까지 히브리어 학습에 방해가 된다며 듣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아들이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갔다. 인형, 아이스크림, 젤리, 오트밀, 손수건, 수건, 자전거 기타 등등, 고대 히브리어에 없는 단어들이 자꾸 튀어나왔다. 벤 예후다는 성경과 탈무드를 뒤지며 이들 단어에 적합한 단어를 찾아냈다. 없으면 스스로 만들어 현대 히브리어에 추가했다. 아들의 성장과 함께 현대히브리어 어휘도 늘어갔다.
아들과 완벽한 히브리어 대화가 가능하게 되자 벤 예후다는 팔레스타인 각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동료 언어학자, 동료 교사들이 동참했다. 히브리어로 쓴 교과서도 없었고, 문법서적도 없었다. 이들은 눈과 몸짓으로 어린이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아이들은 유창한 히브리어로 떠들어댔다”고 했다.
동시에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 신문을 창간했다. 매일매일 동료들과 본인이 창안한 단어들을 신문에 게재해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사용을 유도했다. 이 신문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히브리어는 이제 예배당을 벗어나 공부방으로, 학교로, 그리고 가정으로 갈 것이다. 드디어 살아 있는 언어가 될 것이다.”
일상 대화를 벗어나 현대 과학과 철학을 히브리어로 공부하기 위해 벤 예후다는 스스로 과학을 공부했다. 하루에도 몇 페이지씩 히브리어사전을 만들어나갔다. 하루 18시간 동안 책을 본 적도 있었다. 17권짜리 ‘고대 및 현대 히브리어 사전’이 탄생했다. 그와 동료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1921년이 되자 대부분의 젊은 유대인들은 마침내 히브리어로 생각을 하고 히브리어로 철학을 논할 수 있게 됐다. 1922년 11월 29일,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공용어는 (다른 외국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라고 공식선언했다. 그가 염원한 언어 통합, 언어 복귀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한 달 뒤 엘리에제 벤 야후다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초인적인 노동의 결과 한쪽 눈이 먼 상태였다.
훗날 사람들이 말했다. “그가 있기 전에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비로소 히브리어를 사용하게 되었다(Before Ben-Yehuda Jews could speak Hebrew; after him they did).” 민족애로 중무장한 초인적인 천재 한명이 2000년 전 잃어버렸던 언어를 완벽하게 부활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