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내부 상의사(尙衣司: 궁중의 의복을 담당하던 관청)와 약방에 소속되던 기생은 이번 새 관제에 빼어버린 고로 회사를 조직하고 기생들을 모집하되 기부(妓夫: 기둥서방)는 모두 쫓아 보내고 회사에서 관할하기로 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22일)
대한제국의 몰락은 기생의 생계도 위협했다. 조선시대 기생은 주로 관아의 기안(妓案)에 올라 있는 관기를 의미했다. 내의원 의녀, 상의원 침선비(針線婢)까지 기생에 포함되었다. 궁중이나 관아의 연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주된 임무였던 기생은 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창기(娼妓)와 엄격히 구분되었다. 전국 관아에 소속돼 있던 관기는 갑오개혁(1894년) 때 신분제 철폐로 천민의 신분을 벗고 각자의 삶을 찾아 나섰다. 이어 궁중의 관기도 1907년 일본 주도로 관제가 개편되면서 100여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해고되었다. 이듬해에는 그나마도 30명으로 줄어들었다.
'각 궁사에 거행하는 관기가 80명인데, 50명은 해산하고 30명만 두기로 궁내부에서 의논하는 중인데, 기생들이 각기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분경이 대단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25일)
관기가 해체되고 기생이 자영업자가 됨에 따라 창기와의 구분도 희미해졌다. 원래 기생은 가곡과 가사 같은 상류 계급의 노래를 불렀고, 삼패(노래 잘하는 창기)가 부르는 잡가와 판소리 같은 평민의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1906년 삼패가 기생의 전유물이던 홍우산(紅雨傘)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경시청의 허가를 얻자, 기생은 홍우산에다 '기(妓)'자를 써서 다닐 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관아에서 쫓겨난 기생은 자영업자로 살아남기 위해 대중이 선호하는 잡가와 판소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생과 삼패가 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기생과 창기의 구분이 희미해진 후, 기생은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리따운 '화초기생'과 소리·춤·서화 등에 능한 '소리기생'으로 구분되었다.
1908년 9월 공포된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은 기생이나 창기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해 인가를 얻도록 했다. 관아에서 쫓겨나 자영업자로 전락한 기생들은 영업과 권익 보호를 위해 조합을 결성했다. 1909년 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기생조합인 '한성기생조합'은 문천군 기근 구제를 위한 자선 연주회, 경성고아원 후원을 위한 자선 연주회 등 각종 자선 행사를 열기도 했다.
기생조합은 1914년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명칭이 변경된 이후 기생들의 자율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퇴색하고 기업화되었다. 한성권번, 대정권번, 조선권번 등은 1920년대 이후 주식회사로 확대되었다. 기생의 충원도 권번이 부모에게 200원 내외의 전차금(前借金)을 지불하고 10세 전후의 여아를 데려와 권번 산하 기생학교(기생들이 사군자를 배우는 모습)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권번은 조선물산공진회 등 각종 관제 행사에 기생을 동원하는 역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