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군일 PD

▶ 묻지도 않고 OK, 따지지도 않고 OK !

이순재 선생님은 오늘도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OK’하면서 지붕을 뚫고 하이킥을 내지르신다. 금년에 70대 중반을 넘기셨음에도 불구하고 꽃피는 청춘이시다.

필자가 22년 전(1987년)에 연출한 KBS 청춘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두 씬 밖에 안 나오는 단역이 있었다. 호랑이 같은 의과대학 학장 역인데 필자가 번뜩 떠오르는 배우는 바로 이순재 선생이었다. 대배우에게 무례한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운 감독, 그 역할은 내가 하겠소. 당연히 해야지. 감독이 필요해서 나를 캐스팅했는데."
오직 배우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프로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 자신에게 더 깐깐한 그 분

이순재 선생님은 1997년에 필자가 연출한 SBS 주말극장 ‘꿈의 궁전’의 지배인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하셨다. 당시, 제14대 국회의원을 그만두신 지 얼마 안 될 때였다.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주무대인데 주로 늦은 밤에 녹화가 이루어졌다.

어느 날, 심야에 연출진과 배우들이 녹초가 되어 촬영 현장이나 근처에서 졸거나 잠들었다. 필자도 파김치 같은 몸으로 촬영 현장에 갔을 때 아무도 없었다. 놀랍게도 오직 이순재 선생님만 촬영 현장인 레스토랑 세트(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혼자 서성이며 대본을 들고 연기 연습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 고단하실 텐데 연기자 대기실에 계시지, 왜 혼자 계세요?"
"운 감독, 괜찮아요. 난 이게 편해서."
선생님은 매우 너그러우신데 때론 깐깐하시다. 예의가 없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연기력의 기본을 안 갖춘 사람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깐깐하게 가르침을 주신다.

▶진정한 슈퍼맨

필자가 1977년에 드라마 PD 생활을 한 이래, 선생님이 N.G 내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탁월한 암기력과 연기력의 비결은 무엇일까?

“대본에 몰입하여 낱말을 외우지 말고 의미(뜻)를 철저히 분석하다 보면 저절로 외워지고 터득이 되지.”

선생님은 1956년에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데뷔해서 2009년 ‘지붕 뚫고 하이킥’에 이르기까지 만 53년 동안 무탈하게 대배우의 길을 힘차게 뛰고 계시다. 연극, TV드라마, 영화, 대학 강의는 물론 사회봉사에도 앞장서신다. 40대까지는 한국의 꽃미남 배우 원조로서, 정통 연기술의 도사로서 한국의 극예술을 선도하셨다.

희극, 비극을 망라하며 장르를 초월하는 연기의 대가! 에너지가 넘치는 당신은 진정한 슈퍼맨입니다.